<守岩칼럼>류성룡의 백의종군과 이재명의 방어·생존 지향 정치
“서애는 정치가, 전략가, 학자로서 한국과 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
“한국 고전의 세계화만큼 이제는 인물의 세계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영문 평전(英文 評傳)을 집필한 최병현(73·전 호남대 교수) 한국고전세계화연구소장의 진단이다.
『조선의 재상 류성룡: 전쟁과 기억』(Ryu Sŏngnyong, Chancellor of Chosŏn Korea: On the Battlefield and in Memory)이라는 제목의 560쪽 분량의 평전에는 류성룡의 유년 시절과 공적 발자취뿐 아니라 임진왜란을 둘러싼 한·중·일(韓中日) 갈등과 그 당시의 정세까지 담겼다.
최 소장이 2015년부터 7년에 걸쳐 집필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최근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IEAS)에서 출간됐다. 미국 역사학자 존 미첨은 추천사에서 “류성룡은 정치가, 전략가, 학자로서 한국과 아시아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3월28일 서울 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이대순 전 호남대 총장 등 300명이 넘는 전·현직 관료와 지자체장·학자 등이 참석했다. 이날 축사를 맡은 이대순 전 호남대 총장은 “오늘 기념하는 것은 단순한 책의 출판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이 세계화되는 시작이자 이정표”라면서 감격스러움을 나타냈다. 이홍구 전 총리는 “우리나라 역사를 전세계에 학술적으로 높은 수준의 출판물로 전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공적”이라고 말했다.
3월28일 열린 서애 류성룡 영문 평전 출판기념회에서 최병현 한국고전세계화연구소장은 “이제는 인물의 세계화도 필요하다 ”고 말했다.
●“서애, 공직에 있을 땐 최선 다하고 나라에 버림받은 뒤 백의종군”
최병현 소장은 류성룡이 임진왜란 극복을 이끌어 간 과정을 기술한 『징비록(懲毖錄)』을 영문으로 번역해 2002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징비록』을 번역하고, 이번에 영문 전기를 쓰면서 서애의 업적만큼 그의 태도에 큰 감동을 받았다”며 “서애 선생은 공직에 있을 땐 충성스럽게 최선을 다하고, 나라로부터 버림받고 난 뒤엔 백의종군(白衣從軍: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나아 감)하며 겸손함을 유지했다”고 평했다.
또 “‘조상은 후손을 낳지만, 후손도 조상을 낳는다’는 것을 이번에 느꼈다”며 “조상을 명예롭게 함으로써 후손도 조상을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류성룡의 13대손인 풍산그룹 류진(65) 회장이 평전 집필을 도운 사실을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최 소장은 서애 류성룡에 대해 쓰게 된 연유에 대해 “서애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알려진 것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도 많다”며 “게다가 그의 일대기는 주로 정적(政敵)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잘못 알려진 점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서애의 학문적 성과뿐 아니라 이순신 등 명장을 발탁해 임진왜란 해전을 승리로 이끈 점을 되새기는 것이 ‘후손으로서의 책임감’이라고 강조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최 소장은 20년 이상 우리 고전의 영문 번역에 힘썼다. 그가 번역한 『목민심서』(2010년), 『태조실록』(2014년), 『북학의』(2019년)가 하버드대와 하와이대에서 출간됐다.
류 회장은 서울 충정로 풍산빌딩에 최 소장 연구실을 마련해 집필을 도왔다. 류 회장은 출판기념회에서 “서애 선생의 일대기를 처음으로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가 됐다”며 “그의 리더십은 어려울 때 나라를 구하고 후손들이 배울 수 있게끔 교훈을 남겼다”고 말했다. 류 회장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전체가 어려운 현실에서 서애 선생의 전략과 전술,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류성룡은 자는 이견(而見), 호가 서애(西涯)로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풍산 류씨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받들어진다. 21세 때인 1562년, 형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안동 도산(陶山)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찾아갔을 때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예언을 받을 만큼 총명하고 명민했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 관서를 두루 거치고 이조·병조·형조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류성룡은 정치가로, 경제·군사 전략가로 생애 대부분을 활약했지만,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의 양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큼 영남 사림에서의 위치도 공고했다.
그의 학문 방향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영의정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손수 지어주고 실전에 활용하게 하기도 했다.
1590년 황윤길·김성일 등과 함께 통신사로 왜(倭)의 정세를 살피고 온 뒤로 거의 말년까지 정란에 휩싸인 나라의 중심을 세우는 데에 전심전력했다. 말년에는 북인으로부터 주화론자라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는 정치적 고난을 겪기도 했다. 파직된 뒤에 향리에서 저술한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을 비롯해 『신종록』, 『영모록』, 『지행설』 등을 지었다.
‘도전자 브랜드’ 상실한 이재명號…DJ·노무현의 큰 정치 전통 사라진 민주당
한국의 정치권, 그 가운데 야당이면서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균열이 심화되고 있다. 아무도 그 끝을 알 길이 없다. 이 와중에 이재명(李在明)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 때의 대거 이탈과 성남시장 시절 비서실장의 죽음 이후 미묘한 기류가 새롭게 감지된다. 지금까지 일부 비주류 의원의 당대표 사퇴 요구는 찻잔 속 태풍 수준이었다. 균열이라기보다는 미세한 금에 불과했다.
그러나 4월에 실시되는 전주을 보궐선거 후 비대위 구성론이나 질서 있는 퇴진론 등 다양한 위기수습 방안이 최근 보다 많은 의원들 사이에서 분출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민주당 내 최대 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더미래)’의 동향이 주목된다.
이 모임은 비주류 의원들과 달리 이 대표 사퇴 대신 전면적인 인사 쇄신을 요구하면서 일견 이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격적인 당내 균열을 앞두고 단계적으로 명분을 축적해 나가는 또 다른 수 싸움의 첫 조치로 볼 수도 있다. 양측의 단기적 봉합이자 하반기 본격적인 힘겨루기를 앞둔 숨고르기인 셈이다. 현재 민주당을 지배하고 있는 이같은 정서는 ‘점진주의적 봉합’과 ‘수동적 관리’로 요약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모습은 과거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보인 큰 정치(Big Politics)와 도전자 정신 등 기존의 민주당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가치와 어젠다(agenda)를 선도하고 확장하는 도전자 정치가 아니라 단기적인 권력 셈법과 수동적 관리의 정치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대로는 2024년 총선과 차기 대선 전망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당내 기류를 좀 더 들여다보면, 윤석열 정부의 실책(失策)과 실패(失敗)를 구원의 동아줄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이 또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당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란 점에서 수동적 정치의 한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이 대표의 독특한 리더십 기질과도 연관이 크다. 그동안 민주당은 수많은 부침(浮沈) 속에서도 가치·이슈·태도에선 늘 ‘도전자 브랜드’를 견지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희생과 모험, 그리고 긴 호흡을 통해 정국을 돌파해 왔다. 김대중 총재는 소수 세력인 재야에 지분 50%를 양보했고 노무현 후보는 불리한 단일화를 수용했다. 이런 도전자 전통이 쌓이고 쌓이면서 지금의 민주당이 만들어졌다.
반면 이 대표는 도전자 유형이라기보단 ‘방어형’이자 ‘단기 생존 지향형’에 가깝다. 언제나 정국을 선도적으로 돌파하기보단 그때그때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반사체(反射體)처럼 행동해 왔다. 그런 뒤 조금씩 브랜드 변신을 시도했다.
지난 대선 때 패배가 예감되고 나서야 정치개혁 어젠다를 전면에 내건 게 대표적이다. 최근에도 체포동의안 정국과 전 비서실장 자살사건 이후에서야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튜브 방송에 나와 극단적 지지자들을 자제시키고 비명계 중심의 공천 TF를 구성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부터)와 박홍근 원내대표, 이해찬 상임고문이 3월18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일 굴욕외교 규탄 범국민대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점진적으로 변하는 이 대표의 모습에서 질적인 변화를 발견하긴 쉽지 않다. 이는 비주류로 전락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천아용인’ 카드를 내놓으며 과감한 변신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과도 대비(對比)된다.
이 대표에 비판적인 진영도 입장만 다를 뿐 점진주의적 전술과 수동성이란 측면에선 일치한다. 이처럼 양측 모두 점진적이면서 현실 안주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사이 민주당도 어느새 외부 환경의 변화에 수동적인 종속변수로 전락했다. 당장 이 대표의 선거법 위반 여부 판결과 검찰의 추가 구속영장 청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검찰이 기소를 늦추면 늦추는 대로 민주당은 총선 직전까지 ‘사법 리스크’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런 위기 상황에서 소극적 대응을 지속했다간 실기(失機)할 가능성만 키우기 쉽다. 위기감이 한껏 고조된 뒤에야 부랴부랴 내놓는 비상 대책은 효과가 크게 반감될 수밖에 없다.
●범야권 전체가 점진적·수동적 교착상태 늪에 빠진 형국…서애와 같은 리더십 갖춘 인물을 대망
민주당과 국민의힘으로 양극화된 정치적 대결의 틈바구니에서 이들을 긴장시킬 제3의 세력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거대 양당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 중도나 진보 스펙트럼 속에서 제3의 대안 세력이 출현할 토대가 갖춰지기 마련이다. 자유당을 대체하고 양당의 한 축을 차지한 영국 노동당 모델이나 ‘급진적 중도’를 내걸며 단숨에 제1당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앙 마르슈(En Marche)’ 모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권엔 이런 가능성을 지닌 정당이 보이지 않는다. 정의당도 대안 세력으로 떠오르기엔 힘이 부쳐 보인다.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기존 정치권을 개혁하려는 움직임도 아직은 세(勢)가 부족하다. 범야권 전체가 점진적·수동적 교착상태의 늪에 빠져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누가 도전자 정신을 다시 앞세우며 새로운 캠페인에 나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그 시작은 결국 누가 먼저 직전의 과거와 확실히 단절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마케팅컨설턴트 애덤 모건(Adam Morgan)은 그의 저서 『1등 브랜드와 싸워 이기는 전략』에서 적시한 것처럼 도전자 브랜드란 직전의 과거와 단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 대표 지지파와 반대파 모두 직전의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채 소극적·임시방편적 대응에만 급급한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우리 국민은 서애와 같은 리더십 갖춘 인물을 대망하는 것 같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