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돌·종이와 끝없는 대화…‘살아있는 현대건축 거장’ 구마 겐고
자연과 조화 이루는 ‘약한 건축’ 시대, 구마 겐고의 세계와 철학…“내 건축은 자연에 지는 것”
전세계를 오가면서 400여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일본 출신 건축가로서 ‘살아있는 현대 건축의 거장(巨匠)’으로 통하는 구마 겐고(隈 研吾, Kuma Kengo). 이 거장 건축가가 이번에는 글로벌 IT기업 NHN의 일본법인그룹 신사옥 ‘NHN 아틀리에’의 설계를 맡았다고 NHN이 9월25일 밝혔다.
구마 겐고가 설계를 맡은 ‘NHN 아틀리에’는 NHN이 도쿄(東京) 미나토구(港区)에 있는 13층짜리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사옥의 얼굴인 로고 디자인에는 무인양품(MUJI 無印良品)의 아트 디렉터로 알려진 그래픽 디자이너 하라 켄야(原研哉)가 참여했다.NHN 아틀리에는 크리에이터의 작업 공간, 크리에이터의 모임, 크리에이터의 직장을 의미하는 단어로, 창작의 두근거림이 가득한 환경 속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옥 설계를 맡은 구마 겐고는 "NHN 아틀리에는 예술과 자연의 울림을 주는 장소"라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NHN그룹과 같은 새로운 네트워크가 이곳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했다.
안현식 NHN재팬 대표는 "NHN 아틀리에는 NHN이 2000년 한게임 재팬을 출시하며 일본에 진출한 후 설립한 첫 자체 사옥"이라며 "한게임으로 시작된 일본 사업이 게임뿐만 아니라 웹툰, 클라우드 등으로 확대되고 많은 임직원을 수용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 확보가 필요해지면서, NHN의 비전과 아이덴티티를 나타낼 수 있는 신사옥을 설립하게 됐다"고 말했다.
●작고 낮고 느린 三低 건축가 구마 겐고 …10권이 넘는 책을 쓴 글쟁이
구마 겐고는 1954년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요코하마시(横浜市)에서 태어났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다. 작고, 낮고, 느린 ‘삼저주의(三低主義)’로, 또 다른 대표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이후 일본 건축의 한 축(軸)을 떠받치고 있다. 1979년 도쿄대(東京大)와 대학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1990년 구마겐고건축도시설계사무소를 설립했다.
도쿄대 특별교수. 고치현립(高知県立)임업대학교 학장, 기후현립(岐阜県立) 삼림문화아카데미 특별초빙교수로 있다. 그의 부인 시노하라 사토코(篠原里子)도 저명한 건축가이다. 1990년대 중엽 이래 목재를 사용하는 등 '와(わ, 和)'를 이미지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동시에, '와의 대가'로 호칭된다. 또한 다작가(多作家)이며 해를 거듭하여 다른 장르의 디자인에도 왕성히 도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20여개 국가에서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했다.
구마 겐고는 자신이 지치지 않는 비결로 ‘삶의 세 바퀴’를 꼽는다. 삼륜차와 같은 안정된 주법(走法)으로 꾸준히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규모 프로젝트와 소규모 파빌리온을 균형 있게 진행하는 게 건축가에겐 좋은 보완”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바퀴는 글쓰기다. “글쓰기는 잡음투성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주로 글을 썼다. 그렇게 쓴 책만 『나, 건축가 구마 겐고』, 『삼저주의』, 『작은 건축』, 『약한 건축』 등 10권이 넘는다.
1997년 ‘모리부타이·도요마마치 전통예능전승관’으로 일본건축학회상을, 같은 해에 ‘물/유리’로 미국건축가협회 듀퐁 베네딕투스상을 받았다. 2001년 ‘돌미술관’으로 국제석재건축상, 2002년 목재 건축으로 스피릿오브네이처(Spirit of Nature)국제목재건축상을 받았다. 2010년엔 ‘네즈미술관’으로 마이니치예술상을 수상했다.
구마 겐고는 일본 국립경기장, 부산롯데타워 등 유명 건축물을 설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또 하나의 작고 느리고 생태적인 건축을 위해 서울 남산을 찾았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구마 겐고가 서울 남산을 찾은 까닭은?
구마 겐고는 유명 건축가이자 왕성한 저술가이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을 살펴보면 『약한 건축』, 『자연스러운 건축』, 『삼저주의』, 『연결하는 건축』, 『작은 건축』 『나, 건축가 구마 겐고』 등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심지어 그는 ‘빙글빙글’, ‘술술술술’, ‘삐죽삐죽’, ‘북슬북슬’ 같은 의태어와 의성어로 건축을 설명하기도 한다. 명백하지 않고 모호한 의태어와 의성어로 풀어낸 건축 이야기는 감각적이고 경험적이고 리드미컬하다. 20세기는 콘크리트와 유리로 구축한 상자를 토대로 강한 건축을 추구했지만, 우리를 상자에서 상자로 이동하는 삶에 길들게 만들었다.
구마는 상자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삶이 서로 포개어질 수 있는 건축을 꿈꾼다. 그러하기에 작고, 약하고, 낮고, 느린 건축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작은 건축’은 단순히 건축의 규모를 줄인 축소판이 아니라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어렵지 않게 만질 수 있는 단위의 건축’에 가깝다. 코로나19로 1년 연기된 도쿄 올림픽은 구마가 설계한 신(新)국립경기장에서 열렸다.
지붕과 외장재 등에 목재를 활용한 새로운 경기장은 이전의 올림픽에서 보여준 웅장하고 압도적인 규모와 형태는 아니었지만, 바람과 볕이 잘 통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아늑하게 감쌌다.
네즈 미술관(根津美術館, Nezu Museum),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라이브러리, 에이스호텔 교토 등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구마 겐고가 서울 남산 자락에 새로 문을 연 화이트스톤 갤러리(Whitestone Gallery)인테리어 작업을 위해 여름에 이어 9월에 또다시 한국을 찾았다.
서울 남산에 위치한 화이트스톤 갤러리 건물 외부의 모습
구마 겐고가 디자인한 화이트스톤 갤러리(위의 사진)와 유리를 활용해 디자인한 화이트스톤 갤러리 내부(아래 사진).
1967년 일본 도쿄에 문을 연 화이트스톤 갤러리가 9월2일 일곱 번째 아시아 지점을 서울에 개관했다. 총 4층 규모로 3개 주요 전시장과 조각 작품을 설치하는 루프톱을 갖췄다.
도쿄와 파리, 두 곳에 있는 구마 겐고 사무실을 오가며 400여 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그에게 매일 비행기 타는 일은 일상(日常)이 되고 있다. 그는 지구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이동하며 글을 쓰고 일을 한다. 건축을 향한 그의 사유(思惟)는 이동 속에서 피어난다. 한국에 막 도착한 그에게 기자가 다음 행선지를 물으니 “부산으로 간다”고 했다. 다음 날 부산롯데타워의 착공 기사가 떴는데 구마 겐고의 설계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약한 건축’의 시대, 구마 겐고의 세계
‘약한 건축!’ 건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익숙한 단어이다. 그런데 건축이 약하고 강하다니, 언뜻 들으면 모순된 말이다. 이를 풀이하자면 이렇다.“지금껏 건축이 자연을 이기고 파괴하는 ‘강한 건축’이었다면, 이제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약한 건축’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 개념을 만든 건 구마 겐고다. 일본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인정받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현대 건축의 거장’이다. 2021년 미국 타임(TIME)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에도 이름을 올렸다.
구마의 건축은 자연을 감히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장소에서 나오는 나무, 돌, 종이를 사랑한다. 못 하나 없이 나뭇조각을 겹쳐 올려 10m 높이의 건물을 완성하는가 하면, 벽을 허물어 바람이 통하도록 해서 자연과 건축을 하나가 되게 한다. 그야말로 ‘자연에 지는, 약한 건축’이다.약하다고 해서 결코 보잘 것 없지 않다. 도쿄올림픽경기장과 네즈미술관, 베이징(北京) 그레이트 뱀부 월(Great Bamboo Wall), 스코틀랜드 던디(Dundee)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ictoria&Albert) 뮤지엄 등 각 도시의 ‘랜드마크’가 그의 손을 거쳤다.
수천 개의 나무 루버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물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 조화롭게 녹아드는 것을 보노라면, 경외감이 밀려온다.구마는 스스로를 “미래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건축은 단순히 건물 모양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통로다. 기후 변화와 환경 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요즘, 구마의 건축이 다시금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다. 그의 건축물은 제주(아트빌라)와 춘천(NHN데이터센터) 등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남산 화이트스톤 갤러리를 함께 둘러본 뒤 건축가로서, 자연을 정복하려는 사람들 틈에서 70년 평생 ‘자연에 지는 법’을 꾸준히 외쳐온 거장의 말은 오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런 메시지를 공유했다.
구마 겐고의 건축은 나무와 땅, 날아다니는 1천 마리의 새가 된다
제주 현무암서 떠올린 리조트부터 조개껍데기 모양 닮은 사우나까지…대규모 공사·자기복제 거부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작고 약한' 건축“
건축은 기본적으로 그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 함께 만들어야 비로소 건축이 그 장소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탄생한다.
그 대지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구마 겐고가 그의 저서 『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에서 한 말이다.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거장이 된 그는 끊임없이 묻는다. 약한 건축, 부드러운 건축, 지는 건축이 가능한가. 그래서 후학들에게 두 가지를 경계하라고 당부한다. ‘불후의 걸작을 남긴 예술가’, 그리고 ‘경이로운 건축 작품’. 대규모 토목 공사와 스스로 브랜드가 돼버린 스타 건축가들이 결국 자기복제로 괴물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건축을 그는 엄중하게 비판한다.
그의 건축물은 늘 자연과 어우러진다. 사람과 산다. 마치 그 대지에 태고적부터 존재해온 우주의 일부인 것처럼 말이다. “건축은 죄악이다”라고 말하던 소년은 전 세계에 크고 작은 400여 개의 건축물을 낳았다. 그의 주요 작품 중 대표작 7선(選)을 소개한다.
●자연과 어우러진 구마 겐고의 대표작 7선
(1) 이탈리아 치도리(CIDORI, 2010)
치도리는 직역하면 1000마리의 새다. 새가 입자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탈리아에서 프로젝트로 진행한 이 공간은 개방적이고 투명한 ‘집’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치도리 코시’는 접착제와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에 홈을 내 얇은 직사각형 격자로 엮는 일본의 전통 건축 기술이다. 견고하게 만든 이런 구조물은 언제든지 한 번에 해체할 수 있다. 이 공간에서 나무는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2) 호주 멜버른-보태니컬 파빌리온(Botanical Pavilion, 2020)
호주 멜버른의 한 식물원 나무에서 벌채된 목재를 사용한 파빌리온 프로젝트다. 이를 폐기하는 대신 나무 주위에 파빌리온을 지어 나무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했다. 방문객들은 다양한 종류의 목재와 구조물 사이를 지나는 빛을 경험하게 된다. 나무들이 퍼즐처럼 맞물려 아치를 만들고, 다공성 나무껍질을 사용해 빛과 공기가 잘 스며들도록 했다. 나무로 지은 숲이랄까. 이 구조는 완전히 재활용할 수 있다. 다른 장소에서 분해와 조립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사진설명: (1) 이탈리아 치도리(상단의 큰 사진), (2)호주 멜버른-보태니컬 파빌리온(아래 큰 사진), (3)바르셀로나 카사바트요 계단과 복도(상단 왼쪽), (4)스타벅스 오모테산도(왼쪽 위에서 두 번째), (5)나오시마 사나마네 사우나-사자에(왼쪽 위에서 세 번째), (6)제주 롯데 아트빌라스-제주볼(왼쪽 위에서 네 번째)
(3) 바르셀로나 카사바트요 계단과 복도(2020)
스페인의 보물급 건축물인 바르셀로나 카사바트요. 가우디가 지중해 빛을 천재적으로 활용한 이 집에 구마 겐고는 자신의 찬사를 더한다. 2020년 내부 인테리어를 맡았는데, 알루미늄 체인 스크린을 사용해 (원래 8층 중앙 테라스에서 쏟아지던 자연광을) 지하의 석탄 저장고까지 다채롭게 끌어내렸다.
(4) 스타벅스 오모테산도(表参道·おもてさんどう, 2011)
일본 도쿄의 스타벅스 오모테산도(表参道)는 폭 7.5m, 깊이 약 40m의 길고 얇은 땅 위에 지어졌다. 작은 나무 조각들을 엮어 빛과 바람처럼 흐르는 유기적인 공간을 만들어 전세계 스타벅스에서도 가장 독특한 장소로 탄생했다. 내부 공간을 덮고 있는 X자형 목재 뼈대는 길이 1.3~4m, 단면 6㎝의 삼나무 약 2000그루를 사용했다. 전체 길이는 4㎞다. 인근 다자이후라는 유적지에 현대 목조 건축 기술이 만나 다른 스타벅스와는 다른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 공간을 만든 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회장과도 친해졌다고 한다.
(5) 나오시마 사나마네 사우나-사자에(2022)
나오시마(直島)의 작은 만(灣) 근처에 있는 글램핑 시설 ‘사나마네’의 중앙에 지은 유기농 목재 사우나 ‘사자에’다. 28㎜ 두께의 합판을 150겹씩 쌓아 만든 목재를 썼다. 평균 벽 두께는 단열과 보온을 잘하기 위해 450㎜로 설계됐다. 외관은 조개껍데기처럼 무수히 접혀 인상적인 그림자를 만든다. 내부에선 몸에 꼭 맞는 주름처럼 어디에 앉아도 편안하다.
빛도 자연스럽게 들어와 명상하게 한다.
(6) 제주 롯데 아트빌라스-제주볼(2012)
구마 겐고는 제주를 방문한 뒤 현무암의 구멍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부드럽고, 둥글며, 뚫린 모양을 건축에 옮기고 싶었다고 한다. 집들을 어두운 둥근 돌로 디자인했다.멀리서 보면 돌처럼 보이고, 가까이 가면 지붕이 된다. 검은 자갈 사이의 틈을 통해 빛이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제주의 풍경 안에 또 하나의 제주를 솟아올려 세운 셈이다.
(7) 런던 밖에 최초로 지은 빅토리아&앨버트(V&A) 던디(2018)깎아지르는 스코틀랜드 북해 절벽…박물관 외벽에 대자연을 심다
영국 스코틀랜드 동쪽 무역항 ‘던디(Dundee)’. 산업혁명을 거치며 항해와 산업용 밧줄을 만드는 식물 ‘주트(jute)’ 생산지로 세계사에 잠시 한 줄 기록을 남긴 곳. 이 별다른 매력도 없는 낯선 곳을 왜 굳이 가야 하나 의아해하던 차, 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 펼쳐졌다. 낯설지만 어디서 본 듯한 거대한 건물이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1852년 만들어진 빅토리아앤드앨버트(V&A)뮤지엄이 런던 밖에 최초로 지은 미술관 V&A 던디였다.던디는 이렇게 이 건축물 하나만으로도 방문 가치가 충분한 곳이 됐다. 쇠락하는 산업으로 도시의 성장동력이 떨어지자 던디시 정부는 2001년 당시 무려 10억파운드(현재 환율로 1조6700억원) 예산의 30년 장기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그 일환으로 이 걸출한 건축물이 자리를 잡았다.
구마 겐고는 2010년 이 건물의 디자인 공모전에 참여했다. 스코틀랜드 북해의 절벽 ‘눕 헤드(Noup Head)’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바다와 땅이 수천, 수만 년의 시간 동안 때론 거칠고 때론 다정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일군 절경을 던디 시내 중심부 테이 강변에 자연의 일부처럼 옮겨 놨다.
견고하고 육중한 패널 수천 개가 만들어 내는 외관은 시선을 압도하지만 불편하지 않다. 자연을 닮은 모습 때문인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입구 옆 안쪽으로 동굴처럼 강가로 향하는 길은 동심마저 자극한다. 높은 층고의 내부는 차양처럼 설치된 외장재 덕분에 시시각각 달라지는 스코틀랜드의 하늘을 반영한다. 날씨의 변화를 시간에 따라 즐길 수 있다. V&A 던디는 완공된 지 5년 만에 시민들의 쉼과 놀이 공간이 됐다. 마치 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구마 겐고 "나무·돌·종이와 끝없이 대화…내 건축은 자연에 지는 것“
●약한 나무로 강한 콘크리트를 누른다
구마 겐고는 콘크리트로 대변되는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을 지양하고, 주변 환경과 자연 환경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건축을 추구한다. 자연히 그의 건축에서는 나무를 비롯한 ‘자연’이 결코 빠지지 않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0 도쿄 올림픽의 주경기장인 국립경기장도 마찬가지다.
본디 공모에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잘 알려진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 이라크 출신의 건축가. 2004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건축 최고의 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했음)의 설계가 당선됐으나 파격적인 디자인 및 높은 비용 등이 문제가 되어 백지화된 이후 2015년 공모에서 구마 겐고의 설계가 당선됐다.
구마 겐고의 국립경기장은 ‘숲의 스타디움’이라는 테마를 걸고 일본 47개 현(縣)에서 공수해온 삼나무, 향나무, 소나무로 지어진 거대한 목조 경기장으로, 천장이나 기둥, 외벽 등 눈 닿는 곳마다 나무가 사용되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경기장 꼭대기 5층에 총 둘레 850미터 길이의 산책길을 조성해 꽃과 풀과 나무로 꾸민 것이 눈에 띈다.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문을 연 타카나와 게이트웨이역(高輪ゲートウェイ駅: 도쿄도 미나토구에 있는 동일본 여객철역)도 벽과 바닥, 천장할 것 없이 일본 곳곳에서 모은 나무를 깔았다.
작은 건축물이라면 모를까. 8만여명의 관중이 경기장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역사(驛舍) 건축에서 나무는 잘 쓰이지 않는 소재다. 목재가 부식해 낙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마 겐고의 철학은 확고하다. 콘크리트가 상징하는 강한 건축이 아니라 자연을 살리고 장소에 묻어가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약한 건축, 땅의 사람과 자연 및 역사를 품는 자연스런 건축, 작은 건축에 나무를 포함한 자연주의 소재가 맞춤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역설한다.
”콘크리트로 만든 건축은 개축이 힘들지만, 나무는 특정 부분을 손보는 게 용이하다. 나무가 열기에 버티고 부식을 느리게 해주는 기술도 크게 발전했다. 가볍고 부드러운 나무야말로 미래의 형태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올림픽국립경겨장에 나무를 쓰는 것에 반대한 사람들에게 607년 창건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호류지(法隆寺: 나라현奈良県 이코마군生駒郡 이카루가정斑鳩町에 있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와 관련 있는 성덕종聖德宗의 총본산으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출물)의 예를 들었던 것처럼. 구마 겐고는 ‘21세기의 호류지’를 곳곳에 만들고자 한다.
타나카와 게이트웨이역이 나무에 철강을 끼어 맞춘 ‘목강(木鋼) 하이브리드’ 소재를 사용하고 여러 종류의 나무를 모아 덧대고 접함해 강도를 높인 가공목 CLT(Cross Laminated Timber: 집성재 합판의 일종으로, 나뭇결을 서로 직각으로 교차(cross)시키는 방식으로 쌓아 접착함)를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9월초 서울에 온 구마 겐고
‘황금시간대’인 9월2일 토요일 오후, 한국·일본·대만 등 국내외 미술계 인사 200여 명이 서울 남산도서관 인근에 있는 화이트스톤 갤러리에 모였다. 일본 갤러리 중 최초로 한국에 진출한 화이트스톤의 오프닝 행사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건축 거장’ 구마 겐고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구마 겐고는 이번에 새롭게 개관한 화이트스톤 서울점의 리노베이션을 맡았다. 과거에 만들어진 외관(外觀)은 변화를 최소화하고, 내부를 갤러리 공간으로 새롭게 바꿨다. 이날 그는 지하 1층부터 옥상 루프톱까지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을 천천히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VIP라운지에 다다른 그에게 “만족스럽느냐?”는 물음에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매우 만족한다”고 했다.
-화이트스톤 서울점의 리노베이션을 맡았다. 이곳의 콘셉트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공간의 입체적인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장마다 공간 높이를 다르게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갤러리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공간의 변화를 다이내믹하게 즐기면서도 연속성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다.”
-구마 선생의 ‘시그니처’는 나무·돌 등 자연적인 소재인데, 화이트스톤엔 콘크리트가 있다.
“이번엔 기존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는 방식이라 그 장소의 소재를 새롭게 사용할 기회는 없었다. 기둥이나 보(樑: 기둥 위에서 지붕의 무게를 전달해주는 건축 부재部材)도 그대로 놔둬야 했다. 그래서 기존 건축물과 주변의 기억을 계승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장소의 기억을 이어가는 것은 리노베이션 과정에서 특히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자연적 소재 사용한다고 약한 건축 아냐. 기존의 것 존중하고 장소의 기억 이어가는게 중요
-그러면 이것도 ‘약한 건축’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 약한 건축은 단순히 자연적 소재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핵심은 ‘존중’이다. 주변을 존중하고, 기존에 있던 것들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무대에서 주목받는 건축가이다. 무엇이 ‘지금의 구마 겐고’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전부터 자연, 환경, 건축의 공존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내가 꾸준히 환경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해왔던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가도 계속 변화한다. 과거의 구마와 지금의 구마는 어떻게 다른가.
“코로나19 전후로 내 작업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19가 인간의 라이프스타일과 사회 구조를 급속도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번 화이트스톤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대다수의 갤러리는 평평하고 단조로운데, 이곳은 좀 더 역동적으로 보일 수 있게 설계했다.”
-영감을 유지하기 위한 당신만의 습관이 있다면.
“가능하면 차를 타는 대신 걸으려고 한다. 걸으면서 자연의 재료들과 대화하고, 재료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을 즐기고 있다. 때로는 이 과정에 빠져들어 2시간 넘게 걷기도 한다.”
-최근 당신에게 울림을 준 예술가가 있는가.
“3월에 돌아가신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坂本 龍一, 1952~2023)는 예전부터 오랜 친구였다. 그가 남긴 산림보전단체 ‘모어트리즈(more-trees)’를 내가 이어받게 돼서 최근 그를 자주 생각하고 있다.”
지난 9월 사울 남산에 있는 화이트스톤 갤러리를 방문했을 때의 구마 겐고
●호기심 많고 새로운 장소에 가는 걸 즐겨서 항상 두근대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
-남산에 있는 화이트스톤 갤러리 한국지점의 인테리어를 위해 방문했나.
“한국에는 여러 번 왔지만,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뷰(view)를 처음 봤다. 이곳은 정말 특별한 장소다.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라는 특성상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공간 구성에 중점을 두었다.”
-거의 매일 비행기를 타고 여행한다는데, 세계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건축가에게 ‘격렬한 이동’은 일상인가.
“3년 가까이 코로나로 이동이 제한적이었는데, 지난해(2022년)부터 비행기를 편하게 탈 수 있게 됐다. 가지 못한 지역을 방문하면서 최근 여행 스케줄이 많이 타이트해졌다. 코소보와 알바니아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겨 최근 다녀왔다. 호기심도 많고 새로운 장소에 가는 걸 즐기기 때문에 항상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엄청난 스케줄과 이동을 소화하는데, 건강과 좋은 컨디션을 챙기는 비결은?
“걸을 수 있는 거리는 되도록 걷는다. 도쿄뿐 아니라 파리에도 설계 사무소가 있는데, 파리는 도시 전체가 산책하기 좋은 구조다. 사무실과 집 모두 산책에 최적화된 지역에 자리 잡았다.”
-건축가가 되기로 결정한 순간은 1964년 어린 시절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3)가 설계한 국립요요기경기장에서 수영을 하면서 감명받아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때 당신을 사로잡은 건축의 매력은 무엇이었나?
“열 살 가량 됐을 때다. 수영을 하면서 국립요요기경기장(国立代々木競技場: 도쿄도 시부야구 요요기공원에 있는 실내 경기장으로 서스펜션 루프 디자인으로 유명) 천장에서 떨어지는 직선과 곡선의 모습이 멋있게 느껴져 아버지에게 물어봤다. 그때 처음으로 ‘건축가’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원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지만, 사회와 공동체와 연결된 건축, 여러 사람과 협력해서 주위의 환경을 변화시켜나가는 건축에 좀 더 매료되었다.
-미국 유학 이후 1986년 처음 도쿄에 사무실을 열었지만, 버블경제로 10년 이상 도쿄에서 일이 없었다. 이 시기를 어떻게 견뎠나? 그때의 경험으로 배운 점이 있다면?
”1980년대 후반 일본이 버블경제 시기에 진입하면서 도쿄의 프로젝트가 모두 취소됐다. 아픈 좌절의 시간이었지만 낙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도시개발에 집중하던 건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도쿄에서 일이 없어진 덕에 지방 소도시의 작은 프로젝트를 맡아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목수와 대장장이 등으로 활동하며 직접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장인들과 실제 현장에서 함께하면서 학교에서 학문적으로 배운 것만큼 귀중한 경험을 했다. 2002년 ADK 쇼치쿠 스퀘어(현 긴자 쇼치쿠 스퀘어. 128년 된 일본의 메이저 스튜디오. 쇼치구는 1895년 교토의 유명 가부키 극장을 오타니 다케지로가 인수한 데서 시작됐음)를 오픈하며 도쿄로 돌아왔다. 내가 지금 같은 건축을 할 수 있는 것은 1990년대 불황 덕분이다.“
-강한 일본을 보고 자랐지만, 약한 일본에서 건축을 시작했다. 약한 일본 속에서 30년 넘게 건축을 하면서 어떻게 건축가로서 자부심을 지켜나갔는지?
”어린 시절 요코하마의 오래된 목조 주택에서 살았다. 주변은 개발되고 발전하고 있는 데 반(反)해서 낡은 우리 집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아버지는 경제성장 시기에 실직하셨다. 성장과 발전, 거품경제까지 모두 겪은 다음의 일본이 오히려 더 성숙한 사회라고 본다. 단게 겐조 역시 고도 성장기의 건축가가 아니다.
사실 그는 부모님을 모두 히로시마(広島) 원폭으로 잃었다. 전후(戰後) 일본에서 살아온 건축가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되레 강한 건축을 추구했다. 일본은 지진도 많고, 그로 인한 대화재(大火災)도 많은 나라다. 건축가에게 이런 약점이 오히려 위기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건축이 세계적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여러 건축가 중에 당신이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전후 위기의식이 오히려 일본 건축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이 위기를 극복해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토 도요오(伊東豊雄, 1941~ , 이토 도요오 건축설계사무소 대표)나 안도 다다오처럼 일본에는 훌륭한 건축가가 많다. 이들은 콘크리트와 유리 같은 20세기의 재료를 사용했지만, 나는 전통 소재인 목재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 목조건축 관련 책을 준비하고 있어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봤다. 유사점도, 차이점도 분명하다. 한국이나 중국은 굵은 나무를 박력 있게 사용하는데, 일본은 얇은 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자원의 한계다. 이 한계를 활용해 건물을 짓다 보니 일본 건축은 선이 얇고 섬세한 스타일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에 어떤 재료를 선택하느냐는 건축에서 중요한 화두이다.
-도쿄와 파리에 건축 사무실이 있다. 진행되는 프로젝트도 400여 개라고 들었는데, 이를 어떻게 관리하는가?
“일본 사회는 상하 관계와 효율적인 시스템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사실 나는 모든 직원과 친구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하는 걸 선호한다. 이런 관계가 오히려 관리를 쉽게 한다고 본다. 외국에서는 일본의 조직관리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개인에게 자유를 주어야 교류할 수 있고, 그런 원활한 흐름이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이패드로 도면을 확인하지만 메모는 읽지 않고, 바로 직원에게 전화해서 물어본다는 글을 읽었다. 당신은 어떤 리더인지 궁금해지는데.
“종종 일을 축구에 비유한다. 축구에서 패스를 빠르게 하는 스타일의 선수가 있는데, 자신한테 공이 오면 갖고 있기보다 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겨서 일이 진행되도록 하는 걸 좋아한다.”
-패스를 하면서 감독 역할도 해야 하지 않는가.
“나의 일은 감독이 아니라 정말 패스를 하는 일이다.”
-여러 매체에 소개된 구마 겐고의 책상과 책장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 어지러워서 주변에선 오히려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런 혼돈 속에서도 정확하게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찾을 수 있나?
“내 책상 주변에는 다른 직원의 책상도 많다. 전체적으로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두 알고 있다. 정리가 안 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름 정리를 해놓은 것이다.”
-대규모 건축, 작은 건축 그리고 글쓰기. 건축가 구마 겐고를 움직이는 세 가지 축이다. 책도 많이 냈다.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
“비행기 안에서 주로 글을 쓴다. 글을 쓰다 잠깐 자고, 다시 일어나 또 쓴다.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기기가 아니라 작은 수첩에 펜으로 적는다. 이렇게 적은 것을 직원에게 휴대폰으로 찍어 보내면 직원이 문서 파일로 정리해준다. 패스할 때에는 사실 많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직관적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글을 쓰면서 내가 왜 그런 식으로 대답했고 일을 처리했는지 정리할 수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캐나다의 산림 생태학자 수잔 시마드(Suzanne Simard: 저명한 생태과학자이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산림보육학과 교수, TED Summit Talk ’나무가 서로와 대화하는 방법’이 있음)의 회고록 『Finding the Mother Tree』라는 책이다. 그녀는 건강한 숲에는 숲속의 모든 나무에 영양소를 공유하고 연결하고 치유하면서 강력한 네트워크를 조정하는 ‘마더 트리(mother tree)’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아주 흥미롭다.”
●빳빳하고 강한 한지(韓紙)를 사용한 한국의 옛날 집 인상적…“젊은 예술가들이여, 결과보다 과정을 즐겨라”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굉장히 활력이 느껴지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특히 젊은 세대의 에너지가 활기차게 살아 있는 느낌이다. 건축계에서도 가까운 미래에 한국이 큰 영향력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한국에 특별히 좋아하는 건축물이 있나.“나는 옛날 집들에 관심이 많다. 한국 민속촌을 한 번 가봤는데 집에 종이를 사용한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일본 전통 건축물에도 종이를 사용하긴 하지만, 대부분 약하고 잘 찢어지는데, 한지(韓紙)는 매우 빳빳하고 강했다.”
-자주 한국을 방문하는데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이 있나?
“한국 요리를 대단히 좋아한다. 단순히 불고기나 비빔밥뿐 아니라 홍어도 즐긴다. 발효 생선 특유의 독특한 맛과 향이 강렬하다. 한국은 동해, 서해, 남해 등 바다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해산물 종류와 조리법이 다른 게 신기하다. 특히 서쪽을 따라 태안반도와 변산반도에서 즐긴 요리와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서울에서 추천하고 싶은 장소가 있는지?
“지금 성수동에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서울이란 대도시에 소규모 공장이 밀집된 지역이 남아 있어 신기했다. 파리 오피스도 공장이 모인 파리 11구에 위치하는데, 개인적으로 낡은 공장 지대에 끌리는 것 같다.”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젊은 세대에게 심플한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 ‘삶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일은 어디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가?
오늘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묵고, 내일 부산에 간다. 내게는 이동이 특별함보다는 일상이다.
구마 겐고가 자신을 소개한 첫 자서전 『나, 건축가 구마 겐고』…세상을 개척하는 이에게 던지는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
‘세계를 달리며 내일을 짓는다.’중국, 프랑스와 한국. 눈을 뜨면 다른 나라다.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는 스스로를 ‘경주마(競走馬)‘에 비유하며 레이스 하듯 세계를 달린다. 하루걸러 다른 나라에서 아침을 맞는 그의 일상은 국경의 틀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여행자의 삶을 닮았다. 건축가로 걸어온 긴 일생의 여정과 생각을 담은 『나, 건축가 구마겐고』(안그라픽스刊, 2014)는 첫 자서전이자 세상을 개척하는 이에게 던지는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다.
“건축가는 상대를 내려다보며 일을 고르는 엘리트가 아니라 매번 레이스에 나서야 하는 경주마”라고 묘사한 그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린다”고 적고 있다.첫 작품부터 논란을 일으키며 반기를 든 구마 겐고의 건축물은 예술이자 도전으로 일본 건축 역사의 획을 그었다.
단단하고 깨끗한 건축으로 대변되는 현대의 건축 철학에 반기를 든 그는 ‘자연스러운 건축’ ‘연결하는 건축’ ‘약한 건축’ 등 콘셉트로 독자적 길을 걸어왔다.산 속에 감춰진 ‘기로잔전망대’, 유리와 철근으로만 지어진 ‘워터·글래스’, 지역 재료를 이용해 공사비를 5분의 1로 줄인 ‘모리부타이·도요마마치전통예능전승관’, 전통적인 가부키극장의 외형을 따른 극장과 오피스빌딩을 결합한 ‘제5대 가부키극장’ 등이 대표물이다. ‘외관이 없는 건축물’이라 불리는 아오레나가오카는 20세기 공공건축물에 이의를 제기한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비판과 맞서 싸웠던 그는 “새로운 건축에 도전해야만 했다. 용기가 필요하고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며 눈앞의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멀리 보는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며 철학 그대로를 고집하고, 세계적 건축가로 성장한다.매일 새로운 세상을 접하지만 여전히 과거에 머무른 많은 이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구마 겐고의 눈은 미래를 향했다.
갇혀 있는 많은 기업가와 창업가, 디자이너에 울림을 주는 이유다. ‘강했던 시절의 일본이 아닌 지금의 약한 일본을 위한 약한 건축물을 만들자’고 각오하는 그에게 건축은 세상을 보고 표현하고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자의 본질을 그린다.각 나라를 돌아보며 그가 느낀 경제와 문화의 단면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통찰의 힘을 엿보게 해준다.
이익을 중시하는 중국에서 비정함을 느끼면서도 강해지는 스스로의 기질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국 도시개발을 움직이는 유대인의 방법론과 교역 감각에서 국경을 넘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직감한다.그 속의 한국은 급속히 발전한 힘으로 외부에 진출하려는 의욕이 강하다고 묘사한다. 일본 기업에 진정한 위협이 될뿐더러 일본이 누려온 안주함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란 위기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시공능력을 가지고 중국에 진출하지 못하는 일본 기업과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한국 기업을 비교하며 21세기 일본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다.병(病)과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구마 겐고는 자유롭지 못하게 된 오른손을 두고 정신적 발견에 이르기도 한다.“일본에서 어떻게 세계적 건축가가 이렇게 많이 나올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일본이 약해져서 반짝이고 예리한 면이 후퇴하는 바람에 새롭게 파내려갈 가치가 있는 장소가 발견된 것”이라고 일본 건축산업의 발전 이유를 설명한다.
수경(水鏡) 문윤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