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新경영 30년…신사업 구상이 아닌 의식혁명
신경영 30주년 국제학술대회서 발표, 로저 마틴 토론토대 교수 “이건희 회장은 상상력과 통찰력 가진 ‘통합적 사상가’”
1993년 6월7일 삼성그룹 이건희(1942~2020)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한 ‘신(新)경영’의 파장은 대단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메가(Mega) 메시지를 필두로 “양(量)을 버리고 질(質)로 간다”는 역(逆)발상 경영방침을 곁들이고 “7시 출근에 4시 퇴근”이라는 파격적인 근무제를 도입했다.
불량률이 10%가 넘던 무선전화기(휴대폰과는 다름) 15만대를 구미공장에서 불태우는가 하면,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 멈추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1995년 공채부터는 학력제한을 없앴다. 삼성의 상징인 로고도 새로 만들었다. 신경영이란 단순히 경영 전략이나 신사업 구상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혁명이었다. 한국 사회에도 적지않은 충격을 주었다. 기업에 다소 비판적인 MBC마저 1993년 7월31일 토요일 밤 ‘이건희 신드롬의 충격파’라는 90분 특집방송으로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강연을 그대로 내보냈다.
●이건희를 분노케 한 ‘후쿠다(福田) 보고서’
1987년 회장에 취임한 뒤 은둔하던 51세의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7일 신경영을 시작하며 엄청난 발언을 쏟아냈다. 이후 신경영과 관련된 책자는 무수하게 발간됐다. 이 회장이 했던 수백 시간의 강연 테이프를 그대로 풀어 놓은 책도 나왔다.(‘THE REAL 삼성’-권세진/조선뉴스프레스) 이 회장은 늘 근본을 묻고 본질을 추구했다. 다만 그가 처음부터 무슨 ‘신경영’이란 이벤트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신경영이란 이름은 훗날 지어졌고, 삼성 내부에서 ‘삼성新경영’이나 ‘지행33훈’ 같은 책자가 박근희, 윤순봉, 육현표 등의 실무진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회장이 추구하는 본질을 꿰뚫은 책들은 아니다.
칼럼니스트 최홍섭은 신경영 선언 10년 뒤와 20년 뒤에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직접 신경영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디자인 책임자에 꼭 적합한 한국 디자이너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어. 그래서 미국 시카고에서 공부했던 일본인 후쿠다 다미오(福田民郞)를 우연히 알게 돼 바로 앉혔지. 임직원들과 말은 안 통해도 디자인 용어는 서로 아니까 진두지휘하라고 했고 삼성에서 몇 년 근무했어. 그런데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데 노트에 적은 일기장 비슷한 것을 주더라.
쭉 읽어보니 결론은 ‘도저히 못하겠다. 엉망이다. 내(후쿠다) 조언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일리가 있다. 회장인 내 말도 안 먹히는데 당신 말이 먹히겠느냐’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고문들을 데려온 것은 선진 기술을 제대로 배우라는 뜻이었는데, 현장에서는 따돌림을 당했구나 싶었다. 끝까지 읽었는데 자잘한 것까지 설명해 놓았더라. 전부 읽어보니 너무 화가 났다. 독일 호텔에 도착한 뒤에는 공장에서 세탁기 뚜껑을 칼로 깎는 비디오까지 보았다. 회사가 썩을 대로 썩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비서팀을 시켜 프랑크푸르트로 회사 임직원 150~200명을 오라고 지시했고, 사람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지에 온 임직원을 본 이 회장의 느낌이다. “거기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왔는지를 모르니 정신이 없어 보였어. 중앙일보 간부들은 내가 보기에 평생 처음 외국에 와서 호텔 샹들리에 하나에도 얼떨떨한 것처럼 보였지. 그때부터 ‘왜 변해야 하나? 우리가 안 변하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밤새 얘기했어. 밤 9시부터 새벽 4~5시까지 매일 하다시피 했지. 200명씩 오고 가고 했어. 스위스(로잔을 가리키는 듯)인가에서는 호텔이 작아서 150명을 불렀지. 이런 식으로 계속 임원들을 불렀어. 비서팀도 초기에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나중에는 심각성을 알았는지, 영사기 돌리고 필름 찍으면서 바삐 움직이더라.”
이건희 회장은 스스로에게 놀랐다고 했다. “매번 6~7시간 떠들었는데 사전에 원고나 준비 없이도 말이 술술 나왔어. 나처럼 말재주 없는 사람이 없는데, 그때 (나 자신을) 갖다 붙이니 몇 시간 동안 저절로 말이 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나왔을까. 지금 하라면 못할 것이다. 그때 이후로는 안 했다. 그 당시 그룹의 중역 상당수가 정리됐지. 이후에 5~7년 걸려 키워서 올렸다. 또 연수원을 제대로 지어야 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건희 회장의 발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 회장을 수행했던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 등 당시 비서팀 관계자들이 밝힌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이 회장은 1993년 2월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베스트바이 매장에 가서 삼성전자 제품이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는 꼴을 보고 분노했다. 여기에선 고장 난 상태로 팔고 있고, 저기에선 공짜로 주는 경품 취급을 받았다. 급기야 계열사 사장들을 미국으로 불렀다. 달러를 쥐여 주고 직접 쇼핑해보라고 지시했다.
이 회장은 또 여러 회사의 전자제품을 분해한 뒤, 삼성 제품과 비교하며 야단치기도 했다. 삼성 제품은 선진 회사에 비해 배선이 복잡하고 지저분했다. VCR의 경우 도시바보다 부품이 30% 더 많지만 가격은 30% 저렴했는데 이런 상황을 이 회장이 직접 언급했다. “이건 물건을 더 팔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정의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신경영이 시작된 셈이다.
당초 그해 6월 이건희 회장은 장기 해외출장 계획에 따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켐핀스키호텔에 진을 치기로 했었다. 켐핀스키는 유럽의 체인 호텔인데, 이 회장이 묵은 곳은 ‘켐핀스키 그라벤브루흐(Gravenbruch)’였다. 프랑크푸르트 남쪽의 아담한 외곽으로 호텔 뒤에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당초 일정은 슈투트가르트에 가서 벤츠와 다른 전자회사를 보고, 파리에서는 아에로스페셜도 방문하기로 했다. 이후 런던을 거쳐 도쿄와 오사카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루프트한자 비행기에 이건희 회장은 1등석의 A2 좌석에 앉았다. 손욱, 이창열, 황영기 등 훗날 삼성 사장급의 경영자들이 같이 탑승했다. 그런데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후쿠다 고문이 쓴 ‘경영과 디자인’이란 보고서가 전달되었다. 수행진은 이 회장이 전날 강행군 회의를 했기에 기내에서는 수면을 취할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비행기 안에서 더 바빴다. 비서팀을 불러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고민해보라”고 지시했다. 비서팀이 내용을 보니 ‘부품을 제자리에 안 갖다 놓고, 느닷없이 디자인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등의 내용이었다. 두 시간쯤 지났다. 비서팀은 “교육이 잘못되어 그렇다. 얼렁뚱땅하는 문화가 몸에 배어서 그렇다.
매출 달성에 급급해 물량떼기 하느라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이 회장은 “그렇다 치자. 근데 왜 그래 됐노?”라고 물었다. 비서팀은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든지, 군대에서 요령 피우는 걸 배웠든지”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이 회장은 “그럼 우리 사회는 와 그래 됐노?”라고 물었고, 비서팀은 대답이 궁색해졌다. 이른바 ‘5 Why’ 질문이었다.
●이건희 회장 폭발케 한 ‘세탁기’ 엽기적 영상
드디어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켐핀스키호텔에 짐을 풀었다. 이건희 회장은 SBC(삼성 사내방송)가 만든 30분짜리 동영상부터 먼저 틀어 보았다. 거기에는 세탁기 뚜껑의 여닫이 부분이 맞지 않자, 작업자들이 칼로 살짝 깎아 내는 엽기적 장면이 들어 있었다. 이미 비행기에서부터 화가 난 이 회장이 그 동영상을 보고는 드디어 폭발했다. “집합!”
서울에서 임원들이 헐레벌떡 날아왔다. 다들 하루이틀 있을 걸로 생각하고 내의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임원들을 독일 등으로 수송하고 현지에서 보내는 팩스 정리 등으로 정신없었던 김인 당시 인사팀 차석(삼성SDS 사장 역임)은 신경영 기간 중 체중이 5㎏이나 빠질 정도였다.
당시 이 회장과 이수빈 비서실장 사이에 질과 양을 둘러싼 심각한 대화가 저녁에 벌어졌다. 소니 디지털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 회장은 2인자인 비서실장의 생각에 크게 실망, 현지에 와 있는 임원들을 다음날 새벽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전날 저녁에 녹음된 내용을 틀어 주었다.
탁자 위에 놓인 녹음기에선 메시지가 쏟아졌다. “이렇게 해 갖고는 삼성이 망한다. 내 등에 식은땀이 난다. 다 바꿔야 되는데. 내가 그렇게 질로 가자고 그러는데, 지금도 세탁기에서 저런 짓이나 하고 앉아서 양(量) 떼기를 하느냐. 질(質)로 가서 적자가 난다면 내 사재(私財)라도 털겠다.” 흥분한 이건희 회장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이수빈 비서실장은 “죄송합니다.
그런데 양이 받쳐 줘야 질이 올라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뭐 공예품 만드는 회사도 아니고…”라고 답했다. 사실 현지에 와 있던 사장들 중 일부는 “회장께서 오버하는 것 같다. 실장께서 잘 설득해 달라”고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실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쨍그랑” 하는 소리가 녹음기에서 들려 왔다. 화가 난 이 회장이 티스푼을 테이블 위로 던졌고 접시에 강하게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였다. 모두 화들짝 놀랐다.
신경영 선언 20주년을 맞아 제작한 2013년 6월7일 삼성 로그인 화면. /photo 삼성
●“질로 가서 적자 나면 사재 털겠다”
이건희 회장 입장에서 이수빈 비서실장은 서울사대부고 4년 선배였고,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가장 신임하는 엘리트 경영자였다. 이 실장은 39세에 제일모직 사장을 맡았는데, 세무조사 때 회계장부 숫자를 죄다 외워 국세청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과 재무감각을 지닌 인물이다. 이 회장 입장에서는 이 실장이 삼성에서 가장 똑똑하니까 잘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양도 중요하다”는 식으로 반발하는 데 실망한 셈이다. 결국 “내가 직접 변화를 선도하겠다”는 의지를 굳혔고, 그것이 “쨍그랑”으로 표출됐다.
그때부터 시작된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강연은 끝이 없었다. 원래 대식가였던 이 회장은 당시 체중이 많이 불어 식사를 잘 안 했다. 그저 양상추와 당근이나 야채 서너 가지를 먹었다. 아침에는 소집을 안 하고 주로 저녁 5~6시에 모였다. 이 회장은 양상추를 먹으면서 녹음기를 갖다 놓고 이야기를 했다. 어떤 때는 오후 6시 전에 말을 시작했는데 끝날 줄을 몰랐다.
비서팀 관계자는 “평소 말이 어눌하고 선문답(禪問答)만 하던 회장께서 청산유수(靑山流水)로 말씀에 불이 붙었다”고 표현했다. 다들 받아 적기에 바빴다. 9시쯤 되니 부인 홍라희 여사가 남편에게 다가가 “임원들 식사 안 하셨을 텐데, 여기서 하도록 하시죠”라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 회장은 저음의 목소리로 “들어가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홍 여사의 조언은 효과가 있었다. 결국 20분쯤 더 하다가 이 회장은 “저기 뭐 좀 갖고 오라고 그래”라고 지시했고, 모두 햄버거를 먹었다.
그러면 이건희 회장에게 신경영을 촉발시킨 보고서를 올린 후쿠다 다미오(福田民郞·75)의 얘기를 들어보면 더 실감이 난다. 교토공예섬유대학 교수를 지낸 그는 1989년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디자인 고문으로 영입됐다. 그는 1993년 6월5일 도쿄 오쿠라(大倉)호텔에서 마쓰우라(松浦), 기보(宜保) 고문과 함께 저녁 8시30분부터 자정까지 이 회장과 첫 직접 면담을 했다. 삼성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토로했고, 보고서를 별도로 제출했다. 그는 “당시 일본 경영자들도 디자인을 판촉 도구로밖에 보지 않았는데, 이 회장은 경영혁신의 핵심 경쟁력으로 이해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보고한 내용이다. “소니의 디자인이 1류라면, 삼성은 2류다. 삼성은 디자인 전략이 없다. 물건을 만들 때 거칠고 정교하지 않다. 특히 금형 기술이 그렇다. 현장에는 원가 개념이 없다. 공정의 수(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다른 부서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정보 공유도 부족하다.”
오디오 설계 전문가로 가끔 이건희 회장과 면담했던 기보 고문은 정리 정돈 문제를 지적했다. “다음 사람이 사용하도록 공구가 늘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하는데 삼성은 중구난방이다. 물건이 잘 없어지고, 부품이 자주 바닥에 떨어져 있다.” 기보 고문은 회사 문화도 지적했다. “상당수 직원들이 밤늦게까지 남아 있는데 그렇다고 일은 안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부장이 퇴근 안 하니 과장도, 사원도 못 했다. 낭비가 심하다.” 나중에 7·4제가 나온 배경이 된 보고였다. 기보 고문이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이건희 회장은 “아직도 그런가? 이 회사를 전부 뒤집어야 한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건희 위기정신과 운명 건 투자는 지금도 통하는 성공전략”
신경영 선언 30주년 국제학술대회…‘이건희 신경영’ 본질은 영원한 혁신…삼성, 일류기업 지속을 위한 과제는?
“우리가 언제까지 변해야 할 거냐. 영원히 변해야 한다. 안 변하면 일류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일대 혁신을 주문했던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맞아 세계 석학들이 선대회장의 리더십과 경영철학을 집중적으로 재조명했다.
10월18일 한국경영학회는 삼성글로벌리서치의 후원으로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선대회장은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수백 명의 임원을 모아놓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 불리는 신경영 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삼성은 반도체와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건희 선대회장 3주기(10월25일)를 앞두고 10월18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선대회장의 신경영 발언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김재구 한국경영학회장,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을 비롯, 국내외 석학과 삼성 관계사 임직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석학들은 30년 전 한국의 한 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건희 선대회장의 독특한 리더십과 경영방식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건희 회장 같은 리더는 드물었다”
로저 마틴 캐나다 토론토대 명예교수는 “40년 넘게 수많은 경영자에게 컨설팅을 해왔는데 이건희 회장 같은 리더는 드물었다”며 “그는 상상력과 통찰력을 가진 ‘통합적 사상가’였다”고 평가했다. 통합적 사상가의 특징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각각 우수한 요소를 포함한 새로운 형태로 창의적인 해결책을 만든다는 점이다.
마틴 교수는 “통상 리더는 과거의 데이터를 근거로 미래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이 선대회장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과거 데이터도 없는 상황에서 가능성과 상상을 바탕으로 전략적 미래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 교수도 이 선대회장을 “단순히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가나 대기업 리더가 아닌 자선가로서의 면모를 가진 ‘르네상스인’”이라고 표현했다. 과거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家)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끌었듯 문화·예술·과학·의료·복지·체육 등 사회 전반의 분야에 공헌하며 경영 외에도 한국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의미이다.
1994년 2월 이건희 회장의 신경을 조명한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의 표지
다른 석학도 ‘이건희 신경영’의 본질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혁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리타 맥그래스 컬럼비아대 경영대 교수는 “30년 전 신경영은 ▲영원한 위기정신 ▲운명을 건 투자 ▲신속하고 두려움 없는 실험 등 현재의 성공전략과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수립됐다”고 말했다. 스콧 스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대 교수 역시 “오늘날 경제·지정학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 선대회장의 ‘가능성을 넘어선 창조’는 삼성과 한국이 미래로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특히 재계와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삼성이 앞으로도 일류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느냐’하는 주제였다. 마틴 교수는 ‘삼성 직원의 몰입도’ 문제를 꼬집었다. 그는 갤럽 통계를 예로 들며 “오늘날 대기업 직원의 17%는 회사의 목표를 회피하고 51%는 관심이 없으며, 32%만 조직에 몰입하고 있다”며 “회사는 큰데 직원은 자신이 부품처럼 작게 느끼지 않도록 사회·타인·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별도의 인터뷰에서 “큰 기업은 돈과 자원이 많아 뭐든 할 수 있겠지만, 삼성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할 수 있다고 해서 아마존이나 알파벳(구글 모기업)처럼 너무 많은 분야에 진출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변화가 아니라 안정이 오히려 이상한 것”
이 선대회장이 평생 그랬듯 위기의식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맥그래스 교수는 “지속 가능한 경쟁우위란 없다는 것, 변화가 이상한 게 아니라 안정이 이상한 것이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른 기업보다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면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로 정보가 투명하게 제공되게 하는 등 보고의 굴레에서 탈피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며 ‘속도’를 강조했다.
하지만 신경영 30주년을 맞아 그간 1등을 지켰던 삼성의 인재관리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업무 환경과 시대 변화에 발맞춰 인사의 새로운 역할을 고민할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 신경영 시대의 대표적 산물이 지역 전문가 제도다. ‘S급 핵심인재’란 개념도 신경영 선언을 계기로 처음 등장했다. S급 인재는 최고경영자보다 더 높은 연봉과 대우를 받으면서 핵심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최근 삼성 내부에서는 조직의 덩치가 커지면서 그룹 계열사나 사업부(삼성전자) 단위로 임직원에게 일률적인 보상을 하는 구조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국내 대기업 대부분이 맞닥뜨린 역(逆)피라미드 인력구조의 함정 역시 피해갈 수 없는 과제로 꼽힌다. 김효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삼성 신경영 선언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 경쟁력’이라는 메시지”라며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문화와 관행을 되돌아볼 때”라고 말했다.
'반도체 초격차' 의지 다진 이재용…"기술·투자로 위기 극복한다“
기흥 차세대 반도체R&D단지 취임 1주년 앞두고 현장 방문…이건희 회장 추모음악회…삼성, 獨뮌헨서 파운드리포럼 "2나노 전장솔루션 양산 준비"
취임 1주년을 일주일여 앞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전자 기흥·화성 캠퍼스에 건설 중인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단지 건설 현장을 전격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위기의 끝'이 보이는 반도체 사업의 재도약을 이 회장이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10월19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이날 오후 삼성전자 기흥·화성 캠퍼스를 찾아 차세대 반도체 R&D단지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반도체 전략을 점검했다. 이 회장은 이날 경영진 간담회에서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 현황을 보고받고, 메모리·파운드리·시스템 등 반도체 전 분야에 대한 경쟁력 제고 방안을 논의했다. 2022년 하반기 이후 찾아온 최악의 반도체 불황기 '출구'가 보이는 상황에서 반도체 사업 미래 경쟁력을 직접 챙기고 나선 것이다.
이 회장은 "대내외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반도체 사업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혁신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하며 흔들리지 않는 기술리더십과 선행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10월19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콘서트홀에서 열린 고(故) 이건희 선대 회장 3주기 추모 음악회를 관람하기 위해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왼쪽부터)이 입장하고 있다. 삼성전자
삼성전자 기흥캠퍼스는 삼성의 반도체 사업이 태동한 곳이다. 1983년 삼성 반도체가 첫발을 뗀 곳으로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하고 1992년 D램 시장 1위, 1993년 메모리 반도체 분야 1위 등을 달성하며 삼성 반도체가 성공 신화를 이룬 중심지였다. 이 같은 점에서 이날 이 회장 방문은 삼성전자를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로 만든 선대 회장의 유업을 이어 '반도체 초격차'를 지켜가겠다는 의지를 강조하기 위한 차원으로 풀이된다.
이 회장은 2022년 복권 이후 첫 공식 행선지로 기흥캠퍼스를 선택하기도 했다. 당시 반도체 R&D단지 기공식에 참석했던 이 회장이 1년 만에 다시 기흥캠퍼스를 찾은 것은 그만큼 반도체 사업에 대한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다.
반도체 산업은 삼성의 주력 사업일 뿐 아니라 한국 수출의 대들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미·중(美中) 간 기술 패권 경쟁이 심해지면서 경제·안보 동맹의 연결고리 역할도 맡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에서 올해 3분기까지 적자를 지속하고 있지만, 핵심 기술을 위한 선행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투자는 이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됐다는 전언이다.
이날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에서 진행된 경영진 간담회에는 경계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대표이사), 이정배 메모리사업부장(사장),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 송재혁 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사장) 등 DS부문 경영진이 참석했다. 해외 출장 중인 일부 경영진은 영상회의로 참석했고 첨단 공정 개발 현황과 기술력 확보 방안, 공급망 대책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 건설되는 삼성 차세대 반도체 R&D단지는 미래 반도체 기술을 선도하는 핵심 연구기지로 2030년까지 약 20조원을 투입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연구·생산·유통이 한곳에서 이뤄지는 복합형 연구단지이기에 첨단기술 개발 결과물을 양산 제품에 빠르게 적용할 수 있다.
희귀병 아이들에 3000억, 감염병 정복 7000억…‘절망’치료한 기부
이건희 전 회장 ”어린이는 미래의 희장“ 강조…희귀병·소아암에 어린이에 희망을…중앙감염병원도 2026년 착공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은 기업의 사명 중 하나로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제시했다. 2010년 사장단 회의에서의 일이다. 그 발언이 유지(遺志)가 돼 유족은 2021년 5월 건강을 위한 분야에 1조원을 기부했다. 그중 7000억원이 감염병 예방 인프라 구축에 쓰인다.
한국 최초의 감염병 전문병원인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에 5000억원이 들어가고 2000억원은 질병관리청 산하 ‘국립감염병연구소’ 건립과 연구 지원에 쓰인다. 중앙감염병전문병원은 일반·중환자·고도 음압병상, 음압수술실, 생물안전 검사실 등 첨단 설비까지 갖춘 150병상 규모의 세계적 수준의 병원으로 건립될 계획이다.
국립감염병연구소의 최첨단 연구소 건축 및 필요 설비 구축, 감염병 백신 및 치료제 개발을 위한 제반 연구 지원 등 감염병 대응을 위한 인프라 확충에 사용될 예정이다. 기부금은 국립중앙의료원에 출연된 후, 관련 기관들이 협의해 감염병전문병원과 연구소의 건립 및 운영 등에 활용한다.
유족은 소아암·희귀질환에 걸려 고통을 겪으면서도 비싼 치료비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300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소아암·희귀질환 퇴치와 연구 지원에 사용된다.
앞으로 10년간 소아암, 희귀질환 어린이들 가운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환아를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치료, 항암 치료, 희귀질환 신약 치료 등을 위한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다. 백혈병·림프종 등 13종류의 소아암 환아(患兒) 지원에 1500억원, 크론병 등 14종류의 희귀질환 환아들을 위해 600억원을 지원한다.
향후 10년간 소아암 환아 1만 2000여명, 희귀질환 환아 5000여명 등 총 1만7000여명이 도움을 받게 될 전망이다. 아울러 증상 치료를 위한 지원에 그치지 않고 소아암, 희귀질환 임상연구 및 치료제 연구를 위한 인프라 구축 등에도 90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유족은 서울대어린이병원을 주관기관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해 소아암, 희귀질환 어린이 환자 지원 사업을 운영하기로 했다.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1층에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의 흉상이 설치돼 있다.
코로나19로 3년여간 세계에서 691만명가량이 목숨을 잃고, 팬데믹이 6년 주기로 온다고 알려진 시대에, 한국 의료계의 역동적인 ‘반격’이 그의 기부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명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이 전 회장의 기부는 국가가 못하는 부분을 민간이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속도가 더딘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정부의 의사결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 중앙감염병병원은 2026년 4월 착공해 2028년 말에 문을 연다. 연구소는 최근 서울 종로구 서울대 의대 부지에 짓기로 결정했으나 연구 지원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 오 교수는 “기부금이 온지 2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 성과를 못내고 있다. 더디게 가고 있어 다음 팬데믹 전에 개원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기부금의 많은 부분이 어린이를 향한 것도 이 전 회장이 생전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이라고 강조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는 1호 삼성어린이집 개원 때 “진작 하라니까”라고 아쉬움을 나타냈고, “모서리가 각지면 안 된다”거나“급식 칼로리가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뜻이 소아암·희귀질환 기부로 이어졌고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희귀질환 중에는 세계 환자가 10명도 안 되는 정말 희귀한 병이 있다. 국내외 전문가와 데이터 등이 총동원돼야 하는 엄두도 못 낼 일을, 이 전 회장의 기부금이 가능하게 한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교사 김모(32)씨는 2021년 4월 병명이 뭔지도 모른 채 생후 100일이 안 된 솔이를 떠나보냈다. 서울대병원 채종희 교수팀이 1년 8개월 노력 끝에 병명을 밝혀냈다. ‘뇌량 무형성증 및 뇌이랑비대증’이라는 병이다. 그 결과를 찾는데 기부금이 쓰였고, 김씨는 다시 희망을 갖게 됐다. 채 교수는 김씨에게 “원인을 찾았으니 둘째를 가져보자”고 제안했다. 9월 임신에 성공한 김씨는 “산부인과 검사받으러 갈 때마다 설렌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기뻐했다. 그는 13주차에 유전자에 문제가 없는지를 검사할 예정이다.
원인 모를 질병에 맞닥뜨렸던 많은 아이와 그 가족이 수백만 원의 비용이 드는 첨단 유전체 검사, 미세 잔존암세포 검사 등을 무료로 지원받아 희망의 빛을 찾았다. 1177명의 희귀암과 335명의 소아암 진단, 2984건의 소아암·희귀질환 관련 연구가 가능했다. 155개 의료기관의 연구진 1059명이 그 일에 몰두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간 소아암 1만2000명, 희귀질환 5000명이 기부금의 도움을 받게 된다.
소아암 표준치료법이 나오면 지방 환자가 수도권으로 오지 않아도 돼 지방 의료 공백 해소에 일조하게 되고, 한국은 희귀질환 퇴치와 연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게 서게 된다는 게 의학계의 평가다. 채종희 교수는 “불확실성으로 힘들어하는 많은 어린이 희귀질환 아이와 가족이 건강한 아이의 출산을 꿈꾸게 됐다. 이번 경험을 토대로 세계 미진단 환자의 질병 확인과 연구를 진행해 글로벌 임상연구의 중심이 될 기회를 맞았다”고 말했다.
수경(水鏡) 문윤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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