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鏡칼럼 -고려 중흥군주 현종의 애민정신과 국가비전
왕욱의 아들 현종 어부지리 즉위…많은 전쟁 치르며 어엿한 군주로 성장
…거란과 여진 등 수많은 외침 막아내고 중앙집권제 확립 등 내치에도 성공해 고려 중흥 이끌어…‘고려판 세종대왕’
조선에 ‘태정태세문단세’가 있다면, 고려에는 ‘태혜정광경성목’이 있고, 목종 다음이 최근 KBS2 TV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으로 유명해진 현종(顯宗, 992~1031, 재위 1009~1031)이다. 고려의 제8대 왕이며, 거란과의 전쟁 중 나주까지 피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72세의 노장(老將) 강감찬(姜邯贊, 948~1031)을 최고 지휘관 ‘상원수’로 임명해서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낸 국왕이다.
고려 역사는 이 전쟁을 기점으로 초기와 중기가 나뉜다고 할 정도이지만, 현종 개인으로도 두 차례 여요전쟁(麗遼戰爭)과 많은 외침(外侵)을 막아내며 놀랄 만큼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28세에 전쟁이 끝났으니, ‘고려거란전쟁’은 청년 현종의 성장 기록이기도 하다. 현종의 이러한 필승(必勝)의 이면에는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고 전쟁의 참화로부터 백성들을 구해내고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애민(愛民)정신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종영한 KBS2 TV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현종의 모습. /사진= KBS화면 캡처
●‘막장 드라마’ 같은 왕실의 사랑
현종은 출생부터가 화젯거리였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太祖 王建, 877~943, 재위 918~943)의 아들 왕욱(王郁, ?~969, 안종安宗으로 추존), 어머니는 태조의 손녀이자 경종의 부인인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王后 皇甫氏, 964 이후~992)였다. 이 짧은 기술(記述) 속에는 고려 초 왕실 혼인에 관한 낯선 사실이 여럿 담겨있다. 경종도 태조의 손자이므로 경종과 헌정왕후의 결혼은 4촌 간의 근친혼이었다. 근친혼에 관한 인식이 지금은 안 좋지만, 그땐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경종이 죽은 뒤 과부가 된 헌정왕후가 궁궐 밖으로 나와 살다가 마침 옆집에 살던 삼촌 왕욱과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 왕실 내의 이러한 자유연애(?)는 아무리 자유분방한 고려 초라고 해도 용납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 국왕 성종(成宗, 960~997, 재위 981~997)은 유교 윤리를 퍼트리는 데 힘쓴, 도덕적으로 진지한 사람이었다. 성종에 의해 왕욱은 즉시 사수현(泗水縣: 경남 사천)으로 유배됐다. 게다가 헌정왕후 마저 출산과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현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멀리 유배지에 있어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성종이 거두어 궁중에서 키웠는데, 두 살 때까지 유모가 ‘아빠’라는 말만 가르쳤다. 아이는 성종을 보고도 ”아빠!“를 불러댔고, 성종은 아이를 가엾게 여겨 왕욱의 유배지 사수현으로 보내 아버지와 함께 살게 했다. 아마도 왕욱이 아들을 곁에 두기 위해 유모를 사주했을 것이다. 3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은 다시 혼자가 되었고, 여섯 살 때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대량원군(大良院君)이란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 뒤로 견제를 받아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힘든 신세가 된다.
헌정왕후에게는 비슷한 삶을 산 언니가 있었다. 경종(景宗. 955~981, 재위 975~981)의 비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로, 자매가 모두 경종의 부인이었다. 헌애왕후는 왕자를 낳았고, 이 아들이 성종에 이어 왕이 된 목종(穆宗, 980~1009, 재위 997~1009)이다. 목종은 심약한 사람이어서 헌애왕후가 태후로서 섭정을 했는데,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했으므로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 불렸다. 천추태후는 외간 남자 김치양(金致陽)과 사랑에 빠졌고, 아들까지 낳았다. 이 또한 불륜이었지만, 태후의 뜻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아들은 어머니 쪽으로 왕실의 피가 섞였으므로 엄연한 용손(龍孫)이었고, 천추태후는 이 아들로 후계자를 삼으려 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으로부터 25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건국 초 거듭된 정쟁 속에 희생되어 증손자 대에는 왕실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결국 출생에 약점이 있는 두 사람, 대량원군과 천추태후-김치양의 소생(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이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천추태후는 열두 살이던 대량원군을 강제로 승려를 만든 다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삼각산(북한산)의 신혈사(神穴寺: 고려 성종 때 여철如哲이 창건. 이 사찰은 현종이 즉위하기 전 대량원군으로 있을 때 목숨을 구한 사찰로 유명.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 있었던 사찰로, 그 당시 진관津寬 스님이 주지로 있었음)로 옮기게 하고는 사람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 태후가 보낸 떡과 술을 먹지 않고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먹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011년(현종 2년) 진관대사가 창건한 서울 은평구의 진관사. 진관대사는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신혈사에 있을 때 목숨을 구해 준 승려로 알려져 있다.
대량원군이 살해 위협을 받는 동안 목종의 정치는 불안하고 민심은 흉흉했다. 왕은 유행간(庾行簡)과 동성 간 사랑을 했고, 유행간은 총애를 믿고 국정을 농단했다. 또 김치양은 천추태후를 믿고 국정을 농단했다. 두 개의 비선(秘線) 권력이 다투는 사이 신하들은 좌불안석이었고, 그 누구도 백성의 삶을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무능한 국왕은 김치양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의심해서 국경을 지키고 있던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 ?~1010, 강조의 정변을 통해 목종도 죽이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추대해 옹립)에게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자신을 보호하도록 명했다.
그와 동시에 대량원군을 불러들였다. 아마 양위할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강조는 왕명을 받들어 개경에 왔으나 오히려 목종을 폐위하고 천추태후도 쫓아내면서 김치양과 유행간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목종이 대량원군에게 양위하려 한 사실을 모른 채 따로 사람을 보내 대량원군을 모셔오게 했다. 우연히도 목종과 강조가 대량원군 옹립에 일치했던 것이다.
●비선 권력들 다투다 현종에게 왕위
그렇게 해서 현종은 아무런 일 없이 무혈로 왕위에 올랐다. 그랬기에 현종이 왕이 되어야 하는 명분과 이유가 따로 만들어졌다. 먼저 어머니의 태몽이다. 헌정왕후가 꿈을 꾸었는데, 곡령(鵠嶺: 고려시대 사용된 옛 지명으로, 개경 송악산의 이칭異稱. 고려를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됐음)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나라 안에 흘러넘쳐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실은 이 꿈은 헌정왕후의 창작이 아니었다. 더 오래전 신라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이 꿈을 꾸었고, 태조 왕건의 증조할머니도 언니에게서 이 꿈을 산 적이 있었다. 이 꿈 덕에 모두 귀인을 만났는데, 헌정왕후는 특별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갖게 될 것’이라는 해몽을 얻었다.
대량원군이 숭교사(崇敎寺: 개성시 환희방 남쪽에 있었던 사찰. 목종 3년(1000년) 개경에 창건된 사찰로 왕실의 원찰願刹로 창건됐음)에 머물 때에는 어떤 승려가 큰 별이 절 마당에 떨어져 용으로 변하고 또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대량원군이더라는 꿈을 꾸었다. 또 대량원군이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는데, 해몽은 이러했다. 닭 우는 소리 ‘꼬끼오’는 곧 ‘고귀위(高貴位)’이니 높고 귀한 자리라는 뜻이고, 다듬이 소리 ‘어근당(御近當)’은 임금 자리가 가깝다는 뜻이므로 모두 왕이 될 징조이다.
그 예언대로 현종이 왕이 되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예언의 적중은 십중팔구 결과를 아는 뒷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이니, 현종이 즉위한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고 즐긴 사람은 바로 고려의 일반 백성으로, 현종의 즉위와 관련된 설화는 백성의 지지와 기대를 반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현종은 허수아비 국왕일 수밖에 없었고, 모든 권력은 강조의 손아귀에 들어있었다. 그런데 즉위 이듬해 거란의 침략으로 전쟁이 일어나 강조가 전사했다. 권력자의 죽음은 현종에게 기회가 되었다. 전쟁 중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떠났다. 호위하는 군사가 수십 명에 불과했고, 도중에 도적을 걱정할 정도로 궁색한 행렬이었지만, 끝내 자리를 보존했고 거란과 협상을 벌이며 어느덧 항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여진과도 전쟁…동여진 해적 방어
현종은 거란 뿐만 아니라 여진과의 전쟁에서도 고려를 지켜야 했다. 거란이 육지로 침략했다면 여진은 바다를 통해 고려를 침략했는데 이들은 동여진의 포로모타부(蒲盧毛朶部)로 포시에트만에 있는 발해의 항구를 이용해 고려의 동해안을 침략했다. 특히 동여진 해적의 동해안 침략은 이미 목종대부터 시작됐다. 1005년(목종 8) 동여진이 등주(登州) 부락(部落) 30여 곳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등주를 비롯한 동해안 북부지역의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바다를 통해 침략했을 가능성이 크다. 목종은 동여진의 등주 침략 이후 동여진 해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현종 대에 이르러 구체화 되었다. 현종은 즉위년(1009)에 과선(戈船) 75척을 만들어 진명현의 입구에 정박시켜 동북의 해적을 방어하게 했다. 하지만 이내 곧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면서 동여진 해적에 대해 신경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거란과의 혈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현종 2년(1011) 8월, 동여진 해적이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였고 다음해인 현종 3년(1012) 다시 동여진 해적이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 등 동해안을 침략하였다. 청하현·영일현·장기현에 대한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고려군이 막아냈지만, 거란과의 전쟁 이후 계속되는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현종의 성보(城堡) 축조로 이어졌다.
현종은 동여진 해적이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자, 청하(淸河)·흥해(興海)·영일(迎日)·울주(蔚州)·장기(長鬐)에 성을 쌓았다. 동해안 북부에 집중적으로 축성했던 목종과 달리 현종은 동해안 남부에 축성하였다. 이는 그만큼 동여진 해적이 남부 동해안까지 위협적으로 침략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당시 개경·서경과 함께 고려의 3경(三京) 중 하나였던 신라의 옛 수도 경주가 침략당한 만큼 고려는 동여진 해적에 대한 방비에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이에 현종은 대대적으로 수군(水軍)을 양성하고, 이를 지휘할 도부서(都部署)를 설치하였다. 도부서는 동계(東界)의 진명도부서(鎭溟都部署)·원흥도부서(元興都部署)와 북계의 통주도부서(通州都府署)·압강도부서(鴨江都部署), 그리고 동남해를 관할했던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가 있었다. 현종이 즉위한 해에 바로 75척의 함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목종 대부터 동여진 해적을 방어하기 위한 축성과 함께 수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종은 수군을 계속 증강시켰고, 그 규모는 현종 10년에 이르러 무려 수백 척에 이르렀다. 일본측의 기록인 《소우기》(小右記)에는 고려의 군함이 매우 거대하여 해적선을 전복시켰고, 그 안에는 온갗 무기들이 가득하였다고 기록됐다. 이러한 고려의 대응으로 더 이상 동해안을 침략할 수 없었던 동여진 해적은 우산국(울릉도)과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는 동여진 해적에 대한 고려의 방비가 효과를 봤다는 방증이다.
●초조대장경판 발원과 7대 실록 편찬
‘성종 대 팔관회는 유교 정치를 추구하면서 다채로운 의례 내용 등이 간소화되었고, 법왕사 행차 등만이 남았었다. 이와 달리 현종은 신라계이지만 태조 혈통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즉위과정 상에 있었던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또 거란 침입에 대한 대응을 위해 왕실의 위상을 회복하고 민심 통합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태조가 행했던 팔관회 복설은 이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 『한정수: 고려 현종~정종 대 팔관회(八關會)의 정비와 그 의미』 (한국사연구회(KCI 우수등재), 2021)
적의 침입으로 황도(皇都) 개경이 함락당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지나, 이제 막 숨을 돌린 고려의 나이 어린 군주 현종은 지방의 호족들을 제압하기에 앞서 민심의 이반부터 다스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1011년(현종 2년) 부처님의 법력(法力)을 통해 불안에 빠진 나라의 신민(臣民)들을 안정시킨 뒤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목적 하에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판각이 발원되었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려 최초의 대장경은 《대반야경》 600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000여 권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에는 정교하고 뛰어난 판화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 고려 회화의 수준과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북송(北宋)에서는 억불(抑佛) 정책이 지나쳐 많은 불교 경전을 불태웠는데 나중에는 이를 만회하고자 고려에 불경(佛經)을 얻으러 올 정도가 되었으니 대장경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불교 문화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디 세계 최초의 한역(漢譯) 대장경인 북송의 《관판대장경》(官版大藏經: 971∼983)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비교해 보면 그 체제가 전혀 다르며, 오히려 북송의 것보다 글씨가 좋고 정교하게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조대장경》은 전세계 두 번째의 한역(漢譯) 대장경으로서 고려의 독자적인 판각으로 당시의 뛰어난 목판인쇄술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초조대장경》은 원래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그리고 팔공산으로 옮겼다.
그 뒤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졌으며,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분인 1715권의 인경본만 전해지고 있다. 대마도(對馬島)의 한 신사에 있던 500권은 모두 도둑맞았으나 그 외에 국내 수집가나 국가 기관에서 인출본을 꽤 많이 역수입하여 현재는 국내에도 상당수의 《초조대장경》을 보존하고 있으며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팔만대장경》도 《초조대장경》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한편 광종 때 벼락을 맞아 무너졌던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현종 때에 이르러 다시 복원했는데 이 역시 불교의 진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차 고려거란전쟁 때 개경이 함락되어 궁궐이 불타고 태조부터 목종까지의 기록도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현종 4년(1013년) 9월 감수국사 최항 등으로 하여금 《7대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덕종 3년(1034년) 황주량에 의해 완성되었다.
●고려 군현제의 확립
고려 6대 성종은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명군 중 1인으로, 고려의 향직 제도를 개편하고 최초로 지방관을 파견하여 난립하는 호족 세력을 견제했던 유능한 군주였다. 이러한 성종의 지방 정책을 이어 나간 현종은 그 혼란스러웠던 거란과의 전쟁 와중에 내치(內治)에서도 매우 괄목할 만한 치적들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손에 꼽는 것이 바로 이 무렵까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의 행정망을 완벽하게 구축한 것이다.
고려 건국 100주년이 되는 1018년(현종 9년) 전국에 ‘4도호부·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을 두어 지방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시킨 후 드디어 체계적인 군현제를 확립하였다. 성종 시기 12목을 설치하면서 파견했던 12명의 지방관 수가 이때에 이르러 116명까지 확대되었으니, 이는 곧 고려 지방제도의 완성이었다.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여겼던 현종은 각 군현 호장(戶長) 등을 비롯한 향리들의 정원(定員)을 규정하고,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 억눌린 호족 세력을 어르기 위한 유화정책으로써 그 자제들에게 과거(科擧) 응시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1022년에는 지방 향리 세력에 대한 호칭을 전면 개정하면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5도 양계 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목(牧)-도호(都護)-군(郡)-현(縣)-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 골격이 완비되었다
현종은 1011년 2차 여요전쟁이 끝난 뒤에는 언제 이런 준비를 했을까 싶을 정도로 국왕으로서 상당히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전쟁의 충격을 안정적으로 수습했으며, 공정한 논공행상을 통해 관료사회를 안정시켰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김훈·최질 등을 직접 처단하는 용기도 보여줬다. 절정은 지방관 파견이었다. 1018년, 고려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에 현종은 전국에 116명의 지방관을 파견했다. 983년 전국에 12명을 파견하기 시작한 이후 35년 만에 이룬 성과로, 고려의 중앙집권을 사실상 완료한 것으로 평가되는 업적이다.
●현화사 비문에 왕욱의 유배 사실 숨겨
현종은 황제의 지위가 안정되면서 스스로 권위를 만들 줄도 알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숭(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 추존追尊)함으로써 출생의 약점을 지우려고 했다. 사수현에 있던 아버지 왕욱의 묘를 개경으로 이장하고, 개경에 대자은현화사(大慈恩玄化寺, 줄여서 현화사)를 창건해 부모의 명복을 빌도록 했다. 역사에도 손을 댔다.
왕욱이 사수현에 내려간 것이 불륜에 따른 유배라는 사실을 숨기고, 거란의 침략으로 수도가 위험해지자 성종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는 내용으로 현화사 비석을 새겼다. 천안에 홍경사라는 절을 지으면서 여행객의 안전을 돌보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훈이란 사실을 밝혀 놓았다.
충남 천안의 홍경사 갈기비(碣記碑). 현종이 1026년(현종 17년) 아버지 왕욱의 유지를 받들어 창건하면서 그 사정을 기록해 세운 비석이다. 여행객의 안전을 돌보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밝혀놓았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판 세종대왕’ 현종
당대와 후대의 평가를 종합하면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략 등 국난을 극복하고 왕조의 틀을 굳게 다져놓아 이후 고려가 전성기를 맞는데 디딤돌을 놓은 ‘고려판 세종대왕’이었다. 현종에 대한 역사 속 평가를 살펴봤다.
‘오랑캐와 화친하여 우호를 맺음으로써 전쟁을 멈추고 문(文)을 닦았으며, 부세를 감면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였고, 뛰어나면서 어진 자들을 등용하고 숭상하여 정사를 닦음에 있어 공평하였다. 안팎이 이에 평안하였고 농상(農桑)이 언제나 풍요로웠으니, 가히 중흥을 이룬 군주라고 할 만하다.’ - 『고려사절요』
위는 고려 전기(前期)의 문신이자 학자인 ‘해동공자’ 최충의 현종에 대한 평가이다. 최충은 현종 시절에도 조정에 있었고 이후 문종 때까지 조정의 신하로 일했다.
다음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제현의 평가이다. 이제현은 현종이 승하(1031)하고 200여년 뒤에 태어났다.
‘(…)현종(顯宗)같은 분은 공자(孔子)가 말씀하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분’이도다.‘-『고려사』
’(…)이 때문에 군자는 잘 다스려질 때에도 어지러워질 것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끝을 처음과 같이 삼감으로써 하늘의 아름다운 도리에 응답한다. 현종과 같은 경우가 이른바 ‘나는 비판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로구나.‘ - 『고려사절요』
『고려사』는 조선 문종 1년(1451) 편찬됐다. 조선 전기 문신인 김종서, 정인지 등이 편찬을 끝내고 당시 이들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 현종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다.
’(…)그러나 목종이 왕위에서 실각하자 국운이 거의 기울 뻔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현종이 중흥의 공을 이루니 나라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문종이 태평한 정치를 여니 인민과 만물이 함께 평화를 누렸다.‘ - 『고려사』
임진왜란 당시 선위(임금이 왕위를 물려줌)하겠다는 선조를 말리며 영의정 유성룡 등 신하들이 현종을 언급하는데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
“(…)고려 현종이 거란의 화를 당하여 나주로 파천하였는데, 사책에 이르기를 ‘경도(京都)의 공사(公私)의 집이 탕연(蕩然)히 모두 비었다’ 하였으니, 그 화가 오늘날의 왜적의 화보다 못하지 않았으나 현종은 마침내 난을 다스리고 정도(正道)로 복귀하여 구적(寇賊)을 몰아내고 구물(舊物)을 회복하여 당대에 태평을 이루어 고려의 성주(盛主)가 되었다‘ - 『조선왕조실록』(선조 26, 1593)
’(…)고려 현종은 거란의 화를 만나 도성이 함락되어 남쪽으로 파천하였지만, 마침내 모든 현인들을 거두어 모아 적분(賊氛)을 숙청하고는 고려조의 훌륭한 덕을 갖춘 군주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7, 1594)
현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다시 일어나게 한다’는 뜻인 ‘중흥(中興)’과 닿아있다. 그는 거란의 거듭된 침략을 막아내고, 전쟁 이후에는 고려 경제와 백성들의 민생을 개선하는데 성과를 냈다고 평가받는다. 호족들이 지배하는 지역에 관료를 파견해 지방 제도를 정비했다. 대장경 제작 등 종교·문화 정책에도 힘을 썼다.
18세에 강제로 황위에 오른 젊은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국가적 위기를 겪으며 성장했다. 1019년 거란에 최종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더 이상 어리고 나약한 군주가 아니었다. 황실의 번영에도 족적을 남겼다. 세 아들 덕종·정종·문종이 차례로 황위를 계승함으로써 목종 이후 끊어질 뻔했던 황실이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족외혼(族外婚)을 통해 황실과 운명을 같이 할 외척이 등장했고, 고려 귀족 사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러 면에서 고려의 중흥으로, 이 중흥 군주의 탄생은 위기를 기회로 만듦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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