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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24년04월22일 06시50분 ]
 水鏡칼럼 -조선 왕릉의 이장과 영화 ‘파묘’ 속 풍수의 진실과 오해
 세종의 영릉, 경기 광주서 여주로 이장…쇠말뚝은 삼각점의 오해…영화 ‘파묘’ 후반은 판타지…   사대주의 풍수관도 구멍    
수경(水鏡) 문윤홍 大記者/칼럼니스트

최근 영화 ‘파묘’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오컬트(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현상) 장르의 영화로서 이례적으로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성공 요인으로는 무당과 굿, 무덤의 이장(移葬)과 제사 등 새로운 볼거리와 배우들의 명연기, 풍수지리와 장례전문가들을 찾아간 감독의 열정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무덤을 옮기는 천릉(遷陵)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 천릉을 하려면 이전의 무덤을 다시 파고 관을 꺼내는 ‘파묘(破墓)’ 행위가 먼저 이루어져야 했다. 최초의 천릉은 현재의 덕수궁 근처에 조성됐던 정릉(貞陵)을 경기도 양주(楊州:현재 서울시 성북구)로 옮긴 것이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의 계비(繼妃: 임금의 후취인 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96)의 무덤으로, 1396년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경복궁에서도 볼 수 있는 곳에 무덤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1367~1422, 재위 1400~1418)이 왕이 된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신덕왕후와 크게 대립했던 태종은 궁궐에서 왕비의 무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신하들에게 정릉의 이전을 지시했고, 정릉이 이곳에 왔기 때문에 현재의 ‘정릉동’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리고 원래 정릉이 있었던 덕수궁 일대는 정동(貞洞)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정릉은 옮겨졌지만, 정릉이 있었던 동네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경기 여주시에 있는 영릉(세종대왕릉). 예종 때에 경기 광주(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서 천릉했다.

현재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세종 이도(世宗 李祹, 1397~1450, 재위 1418~1450)의 영릉(英陵)도 원래의 위치에서 이장된 무덤이다. 영릉이 처음 조성된 곳은 경기도 광주(廣州:현재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던 헌릉(獻陵:태종의 능) 좌측이었다. 세종은 태종의 무덤을 조성한 후, 그 옆자리에 자신도 묻히려고 했다. 세종의 바람대로 영릉은 처음 아버지 곁을 지켰다. 그러나 예종 이황(睿宗 李晄, 1450~1469, 재위 1468~1469) 때에 이르러 영릉의 이장이 결정됐다. 

세종의 능을 조성할 때부터 최양선(崔揚善) 등 풍수가들은 이곳이 무덤이 들어설 땅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히 주장했고, 세조 때부터 이장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최양선은 영릉은 터가 좋지 않고 물길도 새어 나와서 무덤 터로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특히 이곳에 무덤을 쓰면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후사가 끊어지고 장자가 훼손된다)’라고 했는데, 세종의 장자 문종 이향(文宗 李珦. 1414~1452, 재위 1450~1452)과 손자 단종 이홍위(端宗 李弘暐, 1441~1457, 재위 1452~1455),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 이장(懿敬世子 李暲, 1438~1457, 덕종德宗으로 추존)이 연이어 일찍 사망하면서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예종은 결국 영릉의 천릉(遷陵)을 결심했고, 그렇게 해서 길지(吉地)로 선정된 곳이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에 소재한 영릉이었다. 여주시는 세종의 무덤이 옮겨지면서, ‘세종의 도시’라는 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브랜드가 ‘대왕님표’가 된 것 역시 세종대왕을 널리 기억하자는 뜻을 담은 것이다.

사도세자 이선(思悼世子 李愃, 1735~1762)과 정조 이산(正祖 李祘, 1752~1800, 재위 1776~1800, 대한제국 추존 황제로는 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의 현재 무덤도 옮겨진 것이다. 1762년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무덤이 처음 조성된 곳은 양주 배봉산 자락(서울시 휘경동)으로, 현재 이곳에는 삼육서울병원 본관이 자리하고 있다.

비극적인 죽음으로 무덤 역시 터가 좋지 못한 곳에 만들어졌음을 안타깝게 여긴 정조는 왕이 된 후 아버지 무덤의 이장을 결정했다.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을 찾은 끝에 새롭게 결정된 곳은 수원부, 현재 경기도 화성시 지역이다. 무덤의 이름은 ‘현륭원(顯隆園)’이라 정했는데, 왕이 되지 못한 세자이기에, 아들은 왕이지만 자신은 왕이나 왕비가 아니므로 능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원(園)이라는 칭호를 쓴다. 정조의 무덤인 건릉(健陵)도 처음 위치에서 옮겨졌다.

정조는 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사후에도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러나 순조 이공(純祖 李玜, 1790~1834, 재위 1800~1834)대에 이르러 정조의 장인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주도하여, 건릉의 천릉에 착수하였다.

1821년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 1753~1821) 승하(별세) 후 정조와의 합장(合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천릉이 결정되었다. 건릉의 위치가 풍수상 좋지 않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건릉은 현륭원의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고, 무덤에 배치하는 석물(石物) 일부도 다시 만들었다.

현륭원은 고종 때 사도세자가 왕으로 높여지면서, 융릉(隆陵)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융릉과 건릉을 합하여 ‘융건릉(隆健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도세자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야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혜경궁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6)는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존됐다. 
결국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이라 평가받는 세종과 정조의 무덤도 파묘와 이장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영화 ‘파묘’ 속 풍수의 진실과 오해는 뭘까
묫바람과 쇠말뚝을 ‘파묘’를 떠받치는 기둥인데 여기에 오해가…      

지금까지 국내에서 ‘명당’ ‘대풍수’ 등 풍수를 재료로 쓴 영화나 드라마가 있었지만, 최근 개봉한 영화 ‘파묘(破墓)’만큼 흥행한 적은 없다. ‘파묘’란 무덤을 파헤친다는 뜻이다. 어떤 사연이 있어 기존의 무덤을 파서 이장하거나 소각하는 행위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그 묘 때문에 집안에 우환(憂患)이 생긴다고 생각하거나 후손들이 묘지를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파묘’는 무당 화림(김고은)이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재벌 집안(친일파)에 대물림되는 우환을 ‘묫바람’으로 진단하면서 시작된다. 묫바람은 풍수지리의 동기감응설(同氣感應說)을 전제로 한다. 조상의 유골이 좋은 곳에 모셔져 있으면 후손이 좋은 기운을 받아 명당발복(明堂 發福)이 되며, 반대로 나쁜 땅에 묻히면 집안에 불운이 닥친다는 것이다.

‘파묘’가 지어낸 이야기는 후자에 속한다. (다량의 스포일러에 주의를 요함. 스포일러(spoiler)는 게임, 영화, 소설, 만화 등에 대하여 이야기의 줄거리, 중요 사항, 반전 요소, 결말 등을 미리 알려주어 이야기를 감상하는 재미와 흥미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말함.)

그런데 이 영화 속 부잣집에 우환이 잇따르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악지(惡地)이기도 하지만 ‘쇠말뚝[철침·鐵針]’과도 얽혀 있다. 묫바람과 쇠말뚝은 영화 ‘파묘’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영화 '파묘'의 한 장면. 무당 화림(김고은)은 묫바람 때문에 집안에 우환이 이어진다고 진단한다. /쇼박스


먼저 묫바람에 관한 전설부터 살펴본다. 방효유(方孝孺, 1357~1402)는 중국 명대(明代) 초기의 대학자였다. 그가 태어나기 전, 부친이 길지(吉地)를 구해 조상을 안장(安葬)할 때였다. 꿈에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애원했다. “우리가 대대로 살던 곳입니다. 3일만 여유를 주시면 옮기겠습니다. 꼭 보은하겠습니다.” 

노인은 공손하게 절을 하고 떠났다. 한갓 꿈으로 여긴 부친은 이장을 강행했다. 땅을 파자 수백 마리의 붉은 뱀들이 우글거렸다. 이를 다 태우고 묘지를 조성했다. 방효유가 태어나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명나라 연왕(燕王, 주체朱棣, 3대 성조, 1360~1424,  재위 1402~1424, 연호: 영락永樂)이 조카를 쫓아내고 황제에 오를 때, 방효유에게 즉위 조서를 쓰게 했다. 방효유는 거절했다. “9족(族)을 멸하겠다.” “9족이 아니라 10족을 죽여도 못합니다.” 그래서 연왕은 10족을 죽였다. 총 873명이었다. 소각된 붉은 뱀의 숫자와 같았다.

뱀의 소굴을 파헤치는 것이 파묘는 아니지만, 남(뱀)의 집을 빼앗아 묘를 잘못 쓰면서 생겨난 묫바람이다. 영화 ‘파묘’는 나쁜 묫바람의 해결책으로 화장(火葬)을 제시한다. 무당이 묫바람을 진단하고 해법으로 파묘를 할 때, 이를 둘러싼 후손들의 반응과 갈등, 해결과 화해로 스토리가 전개될 것으로 보았다. 전반부는 그렇게 가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에 급변했다. 쇠말뚝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쇠말뚝이란 무엇인가. 땅에는 지기(地氣)가 있는데, 그 흐름을 막거나 끊어 그곳에 터를 잡은 무덤의 후손에게 재앙을 부른다는 쇠 도구이다. 그런데 영화 ‘파묘’의 쇠말뚝은 한 개인이나 고을에 불행을 가져오는 물건이 아니다. 장재현 감독은 그것을 한일(韓日) ‘풍수전쟁’의 비밀 병기로 사용한다. 이 영화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긴 역사적 앙금을 깔고 사건을 전개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으로 조선 정벌을 꿈꾸다 몰락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일본국 관백 1585~1592, 일본국 태정대신 1587~1598)의 세력(서군)과 조선에 관심이 없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 제1대 에도막부 정이대장군 1603~1605)의 세력(동군)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1600년 일본에서 전국의 다이묘들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벌인 전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장악해 에도막부 정권을 세우는 기반이 됐음)로 단판 승부를 겨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패한다. 

영화 ‘파묘’에서 주인공들이 무덤 속을 들여다보는 장면. 왼쪽부터 법사 봉길(이도현), 무당 화림(김고은), 풍수사 상덕(최민식), 장의사 영근(유해진). 하늘이 한반도 모양이다. /쇼박스

조선 정벌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실패하니 도요토미 세력은 얼마나 억울할까. 이 영화에는 이때 패한 어느 다이묘(大名: 10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며 권력을 누렸던 영주)의 한(恨) 맺힌 정령(精靈)이 쇠말뚝으로 등장한다.

도요토미 세력의 서군은 변방의 다이묘로 숨죽여 연명한다. 19세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과정에서 서군은 동군인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다. 이후 서군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조선 정벌을 꿈꾼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다. 1910년 조선을 병탄(倂呑)한 그들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덤이었다.

그들은 조선을 36년간 통치했으나 늘 불안했다. 영화 ‘파묘’는 일본 최고의 음양사(陰陽師) 무라야마 쥰지(村山淳次)로 하여금 다이묘 정령을 관에 넣어 세로로 파묻게 한다. 쇠말뚝이다. 또 그 관 위에 친일파 중추원(中樞院: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존재한 기관) 부의장 박근현의 관을 올려놓는다. 쇠말뚝을 은폐해 뽑히지 않게 한 것이다.

악령 위에 묘를 쓴 후손이 잘될 리가 없다. 그 묫바람으로 3대째 불행이 이어진다. 후반부는 무당 화림과 풍수사 상덕(최민식)이 쇠말뚝을 없애는 판타지로 점프한다.

영화 '파묘'의 한 장면. 풍수사 상덕(최민식, 오른쪽)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이 이장을 위해 관을 열었다. / 쇼박스

영화 ‘파묘’에서 무라야마 쥰지는 음양사이자 조선의 풍수를 잘 알고 다루는 캐릭터인데 그 실제 인물이 일본의 전설적인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라는 설이 있다.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 921~1005)는 10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92)의 대표적인 음양사로, 각종 작품에서 언급되는 음양사 이미지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헤이안 시대 인물인 그는 여우 요괴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실력이 뛰어난 음양사로 천문, 주술, 점복을 주로 다뤘다고 한다. 

8세기 말부터 12세기 말에 이르는 일본의 헤이안시대에는 궁중에 ‘음양사’라는 관직을 두었다. 이들은 달력을 만들고 천문을 관측하는 것뿐 아니라 황실과 나라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고 나아가서는 요괴를 퇴치하는 주술사 역할까지 떠맡았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베노 세이메이. 그는 인간과 여우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지녀 헤이안 시대 천황가를 수호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이야기는 여러 고문서에도 전해지고 있고 일본의 전통극인 분라쿠와 가부키 속에서도 영웅으로 등장한다. 일본 중세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영화 ‘음양사’는 2003년 9월 국내에도 개봉됐다. 

주술을 통해 왕의 병을 고치고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한 기록이 있으며 자신을 따르는 귀신(식신)을 만들어 불교의 노승과 대결에서 이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소개되는 음양사의 모델이 아베노 세이메이라고 하니 그 실력이 대단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영화 ‘파묘’에 나오는 무라야마 쥰지는 실존 인물 무라야 지쥰을 겨냥했다는 게 유력하다. 이름도 비슷하고 시대적 상황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픽션(fiction 허구)이고 창작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와 시대를 논할 때에는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그런데 영화 ‘파묘’에는 세 가지 왜곡이 있다. 물론 상상력을 동원하는 창작물이 완전히 사실(史實)에 근거할 수는 없지만,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쇠말뚝은 삼각점의 오해이다. 삼각 측량을 할 때 기준으로 정하는 세 점이다. 1895년 일본은 200여 명의 측량사를 보내 조선 땅을 측량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많은 조선인이 희생된다. 망국의 슬픔이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삼각점 표석 밑에 마귀를 묻었기 때문에 재액이 닥칠 것이라는 유언비어에 속지 마라”고 시달할 정도였다.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였으나 풍수 침략은 하지 않았다.

참고로 삼각점(三角點)은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구 국립지리원)이 실시하는 기본측량에 의한 다각점·수준점 등과 같이 국가기준점이다. 삼각점은 측량의 규모(각관측角觀測의 정도)에 따라 1등삼각점(대삼각일등본점 또는 대삼각본점)과 2등삼각점(대삼각보점), 3등삼각점(소삼각삼등), 4등삼각점의 4등급으로 나누어진다.

삼각점 설치 전경
 
삼각점 측량
          

삼각측량은 지구상의 수평위치(좌표)를 결정하는 측량으로서,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대한민국 정밀측지망의 골격을 마련하기 위해 남한지역에 16,000여점의 1~4등 삼각점을 광파측정기를 이용한 삼변측량방식의 정밀측지망을 1975년부터 시작하였고 이후 측위 시스템인 GPS의 등장으로 1997년부터 GPS측량기를 사용하여 전체 삼각점을 재정비한 후 전국 망조정하여 성과고시·관리하고 있다.
                                 
둘째, 영화에 등장하는 음양사 무라야마 쥰지는 실존 인물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1891~1968)을 겨냥했다. 그는 1919년 도쿄(東京)제대 철학과 졸업 후 총독부 촉탁으로 조선에 왔다. 민속 관련서 10여 권을 편찬하고 1941년 귀국했다. 가업(家業)인 묘코지(妙廣寺)라는 사찰의 주지직을 승계하기 위해서였다. 무라야마는 조선 말에 참봉 벼슬을 한 지관(地官) 전기응(全基應)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풍수』를 펴냈다. 조선 풍수는 이 책 덕분에 전해진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셋째, 이른바 ‘쇠말뚝설’은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사대주의 풍수관(風水觀)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곤륜산(崑崙山: 중국의 전설에서 멀리 서쪽에 있어 황허黃河강의 발원점으로 믿어지는 성산聖山)에서 3개의 지맥(支脈)이 중국으로 뻗으며, 그 하나가 백두산을 거쳐 한반도로 이어진다’는 관념이 있었다. 곤륜산은 시조, 백두산은 중조, 삼각산은 할아버지 산이 된다. 이렇게 신성한 지맥에 쇠말뚝을 박을 순 없는 일이다. ‘쇠말뚝설’은 그래서 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반대되는 풍수설이 있다. 곤륜산·백두산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곳의 진산(鎭山: 도읍지나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즉 서울은 삼각산, 대구는 팔공산, 부산은 금정산, 광주는 무등산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지방자치 시대에 부응하는 현시대의 풍수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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