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 '울타리' 벗어난 이창용 한은 총재의 광폭 행보
이창용(李昌鏞) 한국은행 총재는 2022년 4월 제27대 총재 취임 이후 1년여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렸다. 물가와 환율 안정을 위해 직진한 시간이었다. 금리를 올릴 만큼 올린 이 총재는 이제 통화정책을 넘어 거시경제 전반으로 눈을 돌리며 광폭 행보에 나섰다.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 기후 변화 등 거대 담론에 대해서도 한은이 주도적으로 공론화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선 정부의 부동산, 교육 정책에 대해 말을 아끼지 않았던 박승 전 총재가 떠오른다는 말도 나온다. 이 총재의 오지랖(?)에 때아닌 그의 부총리 영전설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다만 취임사 등 그의 과거 발언을 되짚어보면 이같은 이 총재의 행보는 이미 예견된 일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023년 6월12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한국은행 창립 제73주년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한국은행 제공
●한은, 거대 담론 건드리다
이 총재는 취임 이후 줄곧 한국이 장기적으로 보면 ‘구조적 저성장’ 기조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구조적 저성장’은 단기간의 경기 진폭을 낮추는 금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다. 그렇다면 금리 바깥의 영역에서 한은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총재의 답변은 명확하다.
그는 취임사에서 “우리 경제가 당면한 중장기적 도전을 생각해 봤을 때 우리 책임이 통화정책의 테두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며 “물가안정, 금융안정 기본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수립에 기여하고 민간 부문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는 ‘지적인 리더(intellectual leader)’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은은 신축 본관으로 이사한 뒤, 각종 세미나를 통해 관련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2023년 4월25일엔 ‘2023년 노동시장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 총재는 “국내외 노동시장의 변화가 일시적인지, 구조적인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며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최근 우리나라는 여성과 고령층의 노동 공급이 증가하면서 취업자 수가 호조세를 보이고 있지만,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노동 공급의 감소 우려는 크다. 이런 부분이 한은의 제1목표인 물가안정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이 총재는 2023년 6월10일에는 2050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와 함께 ‘제1회 녹색금융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탄소배출이 많은 제조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가진 우리나라의 특성상 탄소중립 과제는 기업의 수익성·재무건정성을 악화시키는 악재인 동시에 새로운 금융 리스크로 부각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이 총재는 이틀 뒤인 6월12일 73주년 한은 창립 기념사를 통해선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원이 없다는 이유로 이 문제를 방치해선 안 된다”며, 감독기관과의 정책 공조와 제도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한은은 유사시 비은행에 대한 즉각적인 유동성 공급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한은 안팎에서는 이같은 이 총재의 광폭 행보를 두고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라는 한은의 책무와 크게 동떨어져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 구조적으로 고착화해가는 저성장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은 정부, 한은을 구분짓지 않기 때문이다.
●악마는 ‘현실 정책’, 디테일에 있다
관건은 총재가 바뀐 후에도 한은이 이같은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 여부다. 한은이 정부의 정치색과 무관하게 어젠다를 계속 던질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예컨대 소득·자산 양극화 문제의 경우 보수 정권이 들어선 뒤 흐지부지 됐지만, 이 역시 ‘구조적 저성장’을 고착화시키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이 총재도 취임사에서 “지나친 양극화는 성장잠재력을 훼손시킬 것이기에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 등 거대 담론에 대해서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지만, 성장-물가-금융안정 간 상충 관계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 과제들에 대해선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모습이다.최근 주택 가격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상승세를 멈추고 가계대출도 정책적으로 억제한 상황이고 지방에서는 미분양 주택이 쌓이고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은 우리 경제의 뇌관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은 주택 하방 위험이 높은지, 상방 위험이 높은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 보니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다. 부동산 시장은 금융안정은 물론, 물가안정과도 상관관계가 높은 데도 말이다.대한민국의 씽크탱크를 표방하는 ‘한은호(號)’의 수장인 이 총재의 광폭 행보는 박수를 보낼 일이다. 하지만 그 행보가 ‘선택적’이라면 한은의 영역 확대에도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 정책에서도 이 총재 말대로 ‘계급장 떼고 할 말은 하는’ 한은이 되길 바란다.
최상목 권한대행에 멍석 깔아주는 이창용…수위 높은 발언으로 활로 열어줘
계엄·탄핵 정국이 이어지면서 경제정책의 리더십 공백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이창용 한은 총재가 최상목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구원투수로 연일 등판하고 있다. “권한대행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라며 최 대행이 몸을 낮출 때마다 이 총재가 막후에서 정무적 훈수와 방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에 대해 중앙은행 총재가 할 일을 넘어서는 ‘오지랖 행보’라는 말도 나오지만, 이 총재가 보폭을 넓히기 시작하면서 관가와 재계는 물론이고 정치권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진격의 오지랖’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럼에도 이 총재는 최 권한대행에 대한 지원사격에 나섰다. 최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 임명으로 비판 받자, ‘한국 경제를 고려하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옹호한 것이다. 최 권한대행을 비판하는 일부 국무위원들을 향해선 “고민 좀 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이 총재는 1월2일 한국은행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읽던 중 “여러 간부들이 말을 더하지 말랬는데 읽다 보니 한 마디 안할 수가 없다”며 “지금 최 대행에 대해 여러 비판이 있는 것은 알고 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비판을 할 때에는 최 대행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에 우리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답도 같이 하시는 것이 좋겠다”면서 “특히 국정에 책임이 있는 국무위원들은 그런 비판이 해외 신용평가사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를 고려해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 총재는 “신용등급은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기 굉장히 어렵다”고도 강조했다.
12월31일 최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 3명 중 2명을 임명하자 일부 국무위원들은 반발했다. 이 총재는 최 권한대행이 이를 거부했을 경우, 다시 한번 탄핵 가능성이 높아지며 혼란이 가중되고, 이것이 한국의 대외신인도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미 이날 신년사 원고에 ‘최 권한대행의 결정은 경제를 고려해 어렵지만 불가피한 것’ ‘앞으로 우리 경제 시스템이 정치와 독립적으로 정상작동할 것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출발점’ 등의 내용이 담겼지만, 원고에 없는 말을 보태 최 권한대행에 힘을 실었다. 이러한 행보는 이 총재의 대학 시절부터 이어져 왔다고 한다.
●李 멍석 깔자 추경 열어둔 崔
최 대행은 1월21일 국무회의에서 “국회·정부 국정 협의회가 조속히 가동되면 국회와 정부가 (추가 재정 투입을) 함께 논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가능성을 시사했다. 당초 최 대행은 “예산의 신속한 집행이 먼저”라며 추경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총재가 1월16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비상계엄에 성장률이 둔화돼 추경을 조속히 집행해야 한다. 15조원에서 20조원 정도 규모 추경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닷새 뒤 종전보다 추경에 전향적인 입장을 냈다.
12월31일 최 대행이 여당과 상당수 국무위원 반대에도 두 명의 헌법재판관을 임명한 것도 이 총재의 훈수가 한몫했다. 하루 전 이 총재는 최 대행이 빠진 채 열린 F4 회의(거시 경제·금융 현안 간담회)를 주재하면서 “국내 정치 상황이 조속히 안정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지금 같은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 경제 전반에 충격이 더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튿날 최 권한대행은 국무회의에서 “정치적 불확실성 종식시켜 경제와 민생 위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헌법재판관을 임명하기로 결정했다”며 헌법재판관 2명을 임명했다.
●“박차고 나와 사의” 홍보도 李 작품
특히 이 총재는 최 대행이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반대한 국무위원이라는 점을 대신 알려주기도 했다. 최 대행은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직전 열었던 국무회의의 참석자 중 한 명이었는데, 계엄 해제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국무회의 참석자 중 계엄 선포에 동조한 모든 장관에 대한 탄핵을 검토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그러자 이 총재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야당 위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최상목 부총리가 당시 국무회의에서 ‘계엄에 반대한다’고 밝힌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며 “이후 그가 (국무회의 직후 열린 F4: 최 권한대행, 이 한은 총재,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회의에서) 사의를 표하려 한 것을 내가 만류했다”고 했다.
최 대행을 대신해 당시 상황을 해명한 것이다. 두 사람을 잘 아는 학계 인사는 “시각에 따라 한은 총재의 행보를 정치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라며 “다만 이 같은 행보가 행정부 리더십 공백을 보완해 주는 효과가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학 시절에도 훈수 두기로 유명?
이 총재의 광폭 행보가 평소 여기저기 조언을 많이 하고, 높은 자존감으로 해결사 역할을 하기 좋아하는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총재와 가까운 한 인사에 따르면, 이 총재는 F4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에 대해 한은 금융통화위원들이 이견을 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한다. 과거 한 금통위원이 회의 때 “중앙은행 총재가 정부 의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이 총재는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정부 논의를 이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총재의 자존감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라는 것이다.
이 총재의 ‘오지랖’과 관련된 학창 시절 일화도 있다. 또 다른 그의 측근에 따르면, 서울대 경제학과 80학번인 이 총재는 대학 재학 시절 시험 기간에 일찌감치 자기 공부를 마쳐 놓고 예상 문제지를 만들어 주변 친구들에게 공유하곤 했다고 한다. 또 주변 친구가 사귀던 이성과 헤어졌을 때에는 친구를 위로하기보다 헤어진 이성 친구를 만나 “다시 생각해보라”고 설득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치 할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가” 광폭 행보 이창용에 與 의구심
이러한 이 총재의 광폭 행보를 보는 여권의 심사가 복잡하다. 1월22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 여당 의원 8명은 한은에서 이 총재와 가진 비공개 면담 자리에서 이 총재의 정치 참여 의사를 노골적으로 캐물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인 송언석 의원은 이 총재에게 “자꾸 추경(추가경정예산)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정치 할 생각이 있어서 그러시는 건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이 총재는 “저는 정치에 관심 없다. 이건 경제적 발언”이라고 단칼에 잘랐다. 이 총재는 앞서 경기 부양을 위해 15조~20조 원 규모의 추경 편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 참석자는 “이 총재가 ‘언론에 말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오랜 생각’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이 총재는 사회 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개진했다고 한다. 복수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 총재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등 임금 지급 문제를 거론하며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쓰려는 개인들이 조합을 만드는 등의 형태로 최저임금보다 저렴하게 고용할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해봤다. 법에 저촉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2024년 3월 한은이 낸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 보고서에 담겨 논쟁을 일으켰던 정책이다. 한은은 2024년 10월에는 신입사원 채용 필기시험에 이와 관련한 헌법 문제를 내기도 했다. 한 참석자는 “이 총재가 평소에 이 문제에 굉장히 몰두해 있다고 하더라. 이 총재가 ‘더 구체적으로 논의를 발전시켜 보자’고 해서 당에서도 함께 검토를 해보자는 취지로 말했다”고 전했다.
이 총재는 또 “계엄 사태 이후 해외에서 한국 경제를 많이 염려하고 있다”는 취지로도 말했다고 한다. 이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ㆍ태평양 담당 국장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한 참석자는 “이 총재가 자신이 가진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접한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한 염려를 자세히 전했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이 총재가 주로 말하고 의원들이 경청했다”고 했다고 한다.
이 총재는 최근 사회 현안에 대해 적극적 의견 개진을 하고 있다. 2024년 9월엔 가계 부채 급증과 집값 폭등 원인을 강남의 사교육 과열로 꼽으며 강남 출신 학생들에 대해 대학 입학 정원에 상한선을 두자고 주장했다. 앞서 6월에는 사과값 등 농산물 가격 폭등에 농산물 수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가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한은은) 농업 분야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반박을 듣기도 했다.
당 지도부 관계자는 “한은 총재가 추경을 하라고 하고 사회 현안을 세게 언급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기재위 소속 여당 의원은 “여야 전부에서 ‘정치 할 생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있다”고 전했다. 국민의힘 의원은 “노무현 정부의 고건 전 총리, 박근혜 정부의 황교안 전 총리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처럼 관료 출신들이 위기 때마다 반짝 주목 받았으나 어떻게 됐느냐”며 “정치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